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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 아들 꼭 만나고 싶다, 치대 다닌다니 고마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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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펀치가 치명타였습니다.”
김득구의 뇌수술을 집도한 로니 함그렘 박사는 김득구가 뇌사 상태에 빠져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레이 맨시니는 순간 자신의 두 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말 내 손에 사람이 죽었단 말인가.”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특설 링. WBA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 챔피언은 미국의 레이 맨시니. 도전자는 한국의 김득구. 두 선수는 시작부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향해 연방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라운드가 지나갈수록 김득구의 몸놀림이 둔해졌다.
그리고 14회. 공이 울리자 맨시니는 카운터블로에 이은 강력한 레프트 훅을 날렸다. 김득구가 비틀거리는 순간 맨시니는 가차 없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김득구의 턱에 작렬시켰다. 함그렘 박사가 말했던 그 ‘마지막 펀치’였다.

심판은 양팔을 크게 흔들며 카운트아웃을 선언했고, 김득구는 다시 링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4일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배고팠던 시절, 헝그리 복서의 죽음 앞에 한국민은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이 가난을 물려준 자신 때문이라고 비관한 그의 어머니는 3개월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경기 주심이었던 리처드 그린도 책임을 느끼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7개월 뒤 자살했다. 맨시니도 ‘사람 죽인 복서’라는 비난을 받으며 역시 우울증에 빠졌다. 한국에 와 김득구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는 한동안 복싱계를 떠났다 돌아왔지만 더 이상 폭풍처럼 몰아치던 인파이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김득구 사망 28주년을 맞아 맨시니와 접촉을 시도했다. 마흔아홉 살인 그는 영화배우 겸 제작자로서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다음 달에 만나면 안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12월 9일 샌타모니카에 있는 그의 영화 사무실 앞에서 맨시니를 만났다. 그는 미안하다며 “11월만 되면 기분이 우울해져 조용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인터뷰를 미룬 이유를 밝혔다. 샌타모니카에서 아내,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와인을 마시면서 김득구와의 대결,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해 하나 둘씩 얘기를 꺼냈다.

“누구에게나 즐거움 주는 영화가 좋아”
-복싱계를 은퇴한 뒤 뭘 하며 지냈나.
“1980년대 중반 영화업계에 뛰어들었다. 영화배우 겸 제작자로 활동했다. 현재 ‘챔피언 픽처스’라는 독립영화 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영화를 사랑한다. 와인과 시가 사업도 한다.”

-영화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평소 영화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특히 김득구 사건 이후 방황한 뒤 영화를 통해 새 삶을 찾았다. 복싱은 승패로 희비가 갈리지만 영화는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데 큰 매력이 있다.”

-배우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1998년에 복싱영화 ‘보디 앤드 소울(Body and Soul)’에서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플래시 댄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제니퍼 빌스와 함께한 작품이다. 총 25개 작품에 출연했다.”

-2002년에는 김득구 사망을 영화화한 ‘챔피언’ 시사회에도 참석했는데.
“사실 한국에서 김득구 선수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썩 내키지 않았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미국 촬영 현장을 찾아가 곽경택 감독과 주연배우 유오성을 만나 조언을 했다.”

-한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어땠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우승을 기원하는 의미로 재킷 주머니에 빨간 손수건을 꽂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김득구 사건은 분명 비통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한 일 속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가까워진 것은 나에게 기쁨이었다.”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있나.
“그때 한국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 한국 사람들의 술 문화도 알게 됐다(웃음). 갈비·불고기 등은 지금도 즐겨 먹는다.”

-준비 중인 영화가 있는가.
“‘멍키스 네스트(Monkey’s nest)’라는 영화를 준비 중이다. 마침 한국인 제작자와 여배우를 찾고 있다. 한국어와 영어를 할 줄 알고 노래 실력이 있는 여배우를 캐스팅할 계획이다.”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겠다”
-복싱 얘기를 하자. 김득구와 링에서 맞서기 전 어떤 인상을 받았나.
“모두들 김득구가 누군지 몰랐다. 경기 필름을 보며 그가 보통이 아닌 파이터라는 사실만 알았다. 맞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복서였다. 매니저가 ‘각오 단단히 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한 명은 들것에 실려 간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경기가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나.
“나와 김득구의 라커룸이 바로 붙어 있었다. 링에 오르기 직전에 김득구가 라커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때 매니저가 ‘맨시니, 오늘 경기 쉽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경기 주요 순간들을 설명해 달라.
“탐색전도 없이 김득구가 바로 나의 턱을 가격하고 들어왔다. 나도 ‘그래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라운드 초반에 3연타를 성공시켰는데, 그때 김득구가 나를 밀어낸 뒤 끄떡도 안 한다는 듯 두 팔을 흔들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난 공포를 느꼈다. 매 라운드 내가 압도하다가도 김득구가 곧바로 반격해 들어왔다. 내 복싱 인생에서 경기 중 포기하고 싶었을 때는 그때가 유일했다. 트레이너가 내게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겠다’는 말을 했다. 무조건 KO 시키라는 뜻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금도 후회한다.”

-언제 승리할 것을 직감했나.
“9회를 넘기면서 김득구의 눈동자가 풀리기 시작했다. 정신력 하나로 버티면서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상태였다. 13라운드에서 39타를 연속으로 때려도 김득구가 반응하지 못해 이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그의 상태를 전혀 몰랐나.
“경기장에 대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도 왔는데, 경기 뒤 저녁에 그의 라스베이거스 공연에 초대받았다. 시내트라가 청중을 향해 ‘여러분, 오늘 저는 태어나 가장 멋진 복싱 경기를 봤습니다. 바로 세계챔피언 레이 맨시니입니다’며 나를 무대로 불렀다. 박수를 받은 뒤 계단을 내려오는데, 매니저가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는 ‘맨시니, 안 좋아. 아주 안 좋아’라는 말만 연발했다.”

“네 아빠 살인자” 말에 딸 충격받아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한국 사람들도 사고였다는 걸 알아서였는지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김득구가 영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에게 내 상황은 어땠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고마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으로 인해 한국인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됐다.”

-사건 후 가장 힘들었을 때는.
“아이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봤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어느 날 딸이 친구들로부터 ‘너네 아빠 사람 죽인 적 있다며?’라는 말을 듣고 엉엉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다. 딸하고 그날 함께 경기 비디오를 봤다. 직접 판단하라는 의미였다. 딸은 경기를 보고 나서 ‘아빠 잘못이 아니네요’라며 껴안아 줬다.”

-미국 내 인기도 곤두박질쳤는데.
“그 일 전까지는 언론에서 나를 ‘살아 있는 실제 록키’라며 치켜세웠다. 하지만 사건 뒤 언론은 나를 ‘살인 복서’로 묘사했다. 시리얼·탄산음료·전자제품 광고 촬영이 줄줄이 잡혀 있었는데 전부 취소됐다.”

-형도 복서였다고 들었다.
“형도 전도유망한 복서였지만 1981년 2월 밸런타인데이 때 어이없게도 여자친구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그때 내 삶의 일부분도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복서로서 승승장구했는데.
“형이 죽고 15개월 뒤 내가 21세 때 라이트급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챔프 자리에 있었을 때는 물론 좋았다. 하지만 21개월 뒤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나.”

-김득구 사망 뒤 복싱 규정이 바뀌었다.
“WBC와 WBA 타이틀전이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단축됐는데, 난 반대했다. 그 일 이후 두 달 안에 복싱 링에서 두 건의 사망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신문에서 단신 처리된 정도였다. 나와 김득구 경기는 전국 방송국인 CBS에서 토요일 낮에 중계돼 파장이 더 컸다. 하지만 눈에 보이면 슬픔이고, 안 보이면 슬픔이 아닌가. 룰이 바뀐 것은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복서로서 김득구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찢어지게 가난했는데도 세계적인 복서로 성장했다.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매년 밸런타인데이 때는 그날 돌아간 형을 위해, 11월 13일에는 김득구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한다.”

김득구 약혼녀·아들 지방에 살아
김득구 사망 당시 약혼녀 이영미씨는 임신 중이었다. 이씨는 아들 지완군을 낳은 뒤 주변과 접촉을 끊고 살아왔다. 수소문 끝에 이씨가 재혼해 지방에 살고 있고, 아들은 치과대학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터뷰 말미에 ‘김득구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자 맨시니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가족에게 너무나 비통한 슬픔을 안겨 줘서. 그럴 뜻은 정말 없었다고. 그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분명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들이 치과대학에 다닌다고 알려줬다. “정말 잘 됐다. 반갑고 고맙다. 언젠가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활짝 펴졌다.

샌타모니카=LA중앙일보 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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