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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여는 사람들] 천안 농산물도매시장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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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매인 정영자씨가 경매에서 낙찰 받은 과일들을 정리하고 있다. 경제한파, 대형마트 등이 이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지만 낙담하지 않는다. 희망을 만들어가며 고된 하루를 이겨내고 있다. [조영회 기자]

지난해 12월 29일 새벽 4시 30분, 천안시 서북구 신당동 농산물도매시장 천안청과. 달콤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눈을 감아도 이곳에 과일이 수북이 쌓여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다.

 상인들은 대형트럭에 있던 과일들을 경매장에 실어 날랐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경매가 시작됐다. 경매사들이 단상에 올라 경매를 진행했다. 그들의 개성있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퍼졌다. 마치 젊은 래퍼들의 신나는 노래 소리처럼 들렸다. 경매사들의 말을 알아듣긴 어려웠지만 중도매인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을 살펴봤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 생산자와 과일 품목, 수량, 금액 등이 상세히 기록되고 있었다. 이건호(생산자)씨의 방울토마토가 2만5000원에 중도매인에게 넘어갔다. 이어 김용원씨의 8kg 멜론이 2만원에 팔려나갔다. 진주서부농협 메론, 오은희씨의 곶감, 임도석씨의 수박도 순식간에 낙찰됐다. 경매시장에도 ‘첨단화’바람이 불어 낙찰시간이 짧아지고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다. 예전에는 경매사와 중도매인들이 수신호로 경매를 진행했지만 지금은 PDA단말기로 응찰하고, 낙찰받는다. 경매사는 낙찰 내용을 불러주는 일을 한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중도매인들은 모든 과일을 취급하고 있다. 이날 감귤과 딸기, 사과, 배, 단감, 메론, 방울토마토, 수박 등이 거래됐다. 계절별로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우스 과일이 많아 제철 아닌 녀석(?)들도 많이 거래됐다.

 하지만 형편에 따라, 사정에 따라 거래량이나 품목이 다르다.

 한 도매업체 주인은 “대형마트가 많아져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며 “형편이 조금 안 좋아 필요한 것만 살 것”이라고 말했다.

 20여 년을 이곳에서 장사했다는 정영자(63·여)씨는 “많은 이들과 거래를 하면서 여러 곳에서 돈을 받지 못해 어려운 적도 많았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래도 얼굴 알면 외상거래도 가능한 정이 넘치는 곳”이라며 “아직 믿음과 신뢰로 장사를 이어 나간다”며 밝게 웃었다.

모니터를 통해 경매가 진행되는 모습.

천일상회를 운영하는 황규자(63·여)씨는 그나마 수완이 좋았던지 대부분의 물품을 사들였다. 우수 중도매인으로 상을 받았을 정도의 ‘실력파’다. 좋은 물건을 이윤을 적게 남기고 파는 것이 비결이란다. 그런 그도 어려움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다. 황씨는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도매시장이 많이 어려워졌다”며 “대형마트 대부분이 외지에서 농산물을 가져다 팔기 때문에 도매시장이 더욱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도 이곳을 통해 거래하면 이곳 상인들의 사정이 좀더 나아질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경매사들도 도매인들과 함께 새벽을 연다. 이날 만난 8년차 경매사(36·천안 쌍용동)는 오전 2시30분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집이 멀지 않지만 경매를 준비하기 위해 조금 더 일찍 일어난다. 자신이 나오지 않을 경우 도매인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결근은 생각도 못한다. 그는 전날도 송년회 회식을 했지만, 오전 3시30분쯤, 칼같이(?) 나왔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당연한 일상이란다.

 그는 “이곳에는 경기도 평택과 오산 등 경기 남부나 천안, 아산, 예산, 당진 등에서도 많이 온다. 공영 시장 중에는 충남에서 제일 크다. 지금은 하루 유통 물량이 1억~1억5000만원 정도지만 예전에는 6~7억원 거래도 많았다”고 경매시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바람은 “시장이 활성화 돼 청과시장 상인들 모두가 잘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해 시민들의 먹을 거리를 책임진다”며 자부심 가득찬 말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같은 시간 옆 동인 채소 경매장도 도매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물량이 적어서인지 같은 시간에 시작했지만 이내 끝났다. 과일에 비해 빠르게 진행돼 업체 사장들은 이내 낙찰 받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경매를 마친 이들은 물건을 정리하고 두 번째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고 분주히 손을 놀렸다. 그들의 빠른 손에 과일 상자들이 차곡차곡 탑을 만들어갔다. 무겁고 힘들어 보였지만, 고단한 몸도 그들에겐 걸림돌이 되진 못했다.

 얼마 뒤 또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다른 곳에서 이른 아침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차에 한가득 과일을 싣고 나갔다. 그들이 안고 간 과일 위에 희망이 한가득 올라가 있었다.

글=김정규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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