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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회·한나라당의 ‘약품 판매’ 이상한 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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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권용진
서울대 의대 의료정책실 교수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2일 보건복지부 새해 업무보고 자리에서 ‘콧물이 나면 내가 아는 약을 사먹는다’, ‘감기약, 미국은 수퍼에서 파는데 유럽은 어떠냐? 자세히 아는 사람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복지부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대통령 말씀에는 의약품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들어 있다. 내가 아는 약을 사 먹는다는 것은 일반의약품의 국민 선택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고, 수퍼에서 판다는 것은 일반의약품의 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두 가지 모두를 보장하지 못한다. 먼저 선택권을 살펴보자. 일반의약품은 약사법에서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전한 약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약을 분류할 때 먼저 일반의약품을 분류하고 나머지를 전문의약품이라고 한다. 즉, 국민이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약을 먼저 분류하고 나머지는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의약품은 가격표시자율제를 시행하고 있어 가격을 약국이 알아서 정하도록 하고 있다. 가격 경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포장지에 적힌 정보가 너무 부실해서 국민이 일반의약품을 선택하기 어렵도록 돼 있던 것을 최근 복지부가 지침을 개정해 용법, 용량, 부작용 등을 알기 쉽게 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모두 일반의약품을 국민이 직접 선택할 수 있을 때 정책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약국에 가면 해열제·진통제뿐 아니라 비타민 음료 하나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일반의약품 진열장을 폐쇄적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은 어쩔 수 없이 약사에게 증상을 말하거나 정확한 약 이름을 말해야 한다. 그러고 약사가 골라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가격은 물론 부작용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전 세계 어느 선진국도 약사가 모든 일반의약품을 골라주지 않는다.

 접근성도 문제다. 세계적으로 일반의약품의 접근성을 높이는 이유는 단순히 밤에 약을 살 수 없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의료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전문가의 판단에만 의존하지 말고 국민들 스스로 자기결정권 행사를 확대함으로써 불필요한 진료·검사 등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감기와 같은 가벼운 질환의 경우 병·의원이나 약국을 찾기 전에 콧물약이나 기침약 정도는 국민이 알아서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큰 틀에서 소비자 권리 강화를 위한 핵심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물론 영국·독일·스웨덴·네덜란드 등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일부 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고 있다. 독일에는 인터넷 약국도 있다. 심지어 최빈국인 아이티도 대형마트에서 해열제를 판다. 이런 나라들은 대부분 자유판매약(GSL)이란 별도의 의약품 분류체계를 갖고 있다. 수퍼에서 팔 수 있는 약을 별도로 정하는 것이다.

이를 반대하는 약사회와 한나라당의 논리는 일반의약품의 부작용이 심각하고 국민이 약을 과다복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약은 위험하기 때문에 전문가인 약사가 골라줄 수밖에 없고 판매도 약국에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다른 선진국 국민들에 비해 헌법적 권리인 자기결정권을 제한 받을 만큼 무지·무식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정부와 여당이 약국 내 일반의약품의 진열장 개방과 일부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해 국민의 선택권과 접근성을 보장해 주길 촉구한다.

권용진 서울대 의대 의료정책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