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마에 겐이치로부터 취할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마에 겐이치가 '한국이 경제적으로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일본, '사피오'지)
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하라는 대로 규제완화, 시장개방, 재벌해체를 추진하고 긴축재정정책을 취해 금융을 경색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을 미국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미국화가 진행되었지만 산업구조의 전환과 같은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한국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실물경제는 그다지 개선되고 있지 못하다며 IMF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질資質까지 거론하였다.
그의 주장은 한국을 잘 모르고 있거나 문제를 과도하게 확대하여 극단적인 비판으로 흐른 점은 있지만 경청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가 평소 일본개혁을 위해서 주장해 온 지론을 참고한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비판은 외환위기, 재벌정책, 산업정책 그리고 가볍게 언급했지만 교육과 문화로 나누어진다.

외환위기와 관련하여, 그는 원래 한국 경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한국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외환보유고가 부족한데다 미국 은행이 지나치게 많이 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외환위기는 한국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은행의 문제라는 점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정부 보증하에 단기외채를 중장기로 전환함으로써 미국 은행의 문제를 한국 정부의 문제로 돌려 버렸고 IMF 자금은 결국 미국 은행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 과연 정부가 손을 떼고 각 기업과 금융기관의 문제로 돌려 지불유예default를 선언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데는 아직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IMF 구제금융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 문제는 이번 대우사태와 관련해서도 정부개입의 한계를 어느 정도 말해 주고 있다. 즉, 정부가 대우의 부채에 대해 지급보증을 해주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대우, 채권금융기관, 투자자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관련 당사자들이 각자 응분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우사태 해결은 채권단 주도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마에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 정부가 미국의 뜻에 따라 이제까지 한국의 경제성장을 지탱해 온 재벌을 해체했기 때문에 재벌은 약체화되어 한국 경제의 자력회생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정부가 5대 재벌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재벌을 ‘경쟁력은 생각하지 않고 몸집만 불리는 조직’으로 몰아세우거나 또는 ‘재벌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등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함으로써 재벌기업의 경쟁력 제고와는 거리가 먼 정책들이 제시된 것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빅딜이다. 기업이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다각화할 것인가 전문화할 것인가는 기업의 자율에 맡겨서 결정할 사항이다. 빅딜의 과정에서 삼성자동차가 가동을 못 하게 되었는데, 애초에 빅딜을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가동을 하면서 생존가능성을 찾든지 좀더 유리하게 매각되든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빅딜은 정부의 정책실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될 것이다.

5+3으로 일컬어지는 정부의 재벌정책 중 상호지급보증 해소, 결합재무제표 작성, 지배구조 개선에서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빅딜과 같이 잘못된 것도 있고 부채비율 200퍼센트와 같이 좀 무리수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다. 부채비율 200퍼센트가 바람직한 목표라는 건 분명하지만 너무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오히려 수익성 있는 사업을 추진할 수 없었다든지 사업을 빨리 매각하도록 하는 압력이 되어 제값을 받지 못하고 팔게 된 경우는 없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배구조 개선에서도 기본적인 방향은 옳지만 너무 미국식 관행과 제도를 맹목적으로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외이사의 비중을 25퍼센트 이상으로 하느냐 50퍼센트 이상으로 하느냐, 그리고 사외이사 추천위원회가 추천하게 하느냐 하는 것도 이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식 지배구조의 관행과 제도는 오랜 세월을 거쳐 변화되어 온 그들의 사고와 문화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한 그러한 제도와 관행이 정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존과 경쟁력을 위한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정착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재벌정책의 목적은 경쟁력 제고이며, 경쟁력이 제고되기 위해서는 기업 내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위해서는 혁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경쟁력 없는 기업을 구제금융으로 살려 줄 것이 아니라 도태시키는 시장경제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여야 한다. 회생가능성이 없는데도 지원을 받는 기업이 상당수 있다는 것은 재벌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혁신의 기초는 자율경영인데 자율경영을 위해서는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면 경영능력이 부족해도 정치권과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총수의 정치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총수의 1인지배가 가능하다. 총수 한 사람이 물러난다고 1인지배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빅딜은 이런 의미에서도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자율경영이 하나의 문화로서 조직 내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권위주의를 타파해 나가야 하는데 이 변화의 출발은 정치권이 민주화되는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5+3의 재벌정책이 재벌기업의 물리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경쟁력 없는 기업을 도태시키는 시장경제원칙의 적용, 정치권의 경제 불개입과 민주화는 재벌기업의 화학적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학적 변화가 현재의 재벌정책에서 소흘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산업정책과 관련해서는 오마에는 이렇게 주장한다. 한국의 산업구조는 부품과 기계를 수입하여 가공조립해서 수출하는 통과경제Pass through로서 대미 수출이 증가하면 대일 수입이 증가하는 종속적 산업구조이다. 따라서 산업구조의 99퍼센트는 일본과 동일한 ‘미니 일본’으로서 환율에 따라 경기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정계, 재계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한 산업정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대통령도 취임 이후 한국이 모방경제에서 독자적 강점을 가지고 환율에 영향받지 않는 경쟁력 있는 산업구조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주장을 보면 산업정책을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오마에는 정부가 직접개입하는 산업정책을 비판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이 점은 본인도 의외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철강, 조선, 컴퓨터, 통신 등 산업별 육성정책을 써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기업을 도와 주면 도와 줄수록 그 기업의 자립능력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경제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정보통신, 물류 등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하여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의 평소 주장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말을 되새겨 보면, 한국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이해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비전은 정부가 손을 떼고 규제완화, 세금인하,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기업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 조성을 통해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경쟁을 심화시켜 나감으로써 경제체질을 강화하여 동북아에서 금융과 산업의 중심지로 되는 것이다. 산업구조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개선되고 독자적인 특성을 찾아 나가게 될 것이다.

정부규제하에서는 독과점체제가 유지되어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고, 대규모 설비투자로 시장을 지배하여 손쉽게 돈 버는 경영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실 없는 모방경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설비투자형 경영이 반도체, 조선, 철강, 자동차, 유화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량생산형 산업구조를 낳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대량고객형Mass Customization 산업구조가 요구되는 정보화시대를 접하고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대량생산형 산업구조는 핵심역량 없이 같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파는 것으로 환율에 따라 경쟁력이 달라지고 임금인상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노사관계가 악화된다.

우리 기업이 1980년대부터 해외진출을 많이 하긴 했지만 세계화의 역량을 가지고 나갔다기보다 노사관계와 같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을 피하여 낙후된 기술과 경영방식을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대우사태와 같은 부실의 요인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마에 겐이치가 말하는 핵심역량 없는 종속경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개입하고 간섭하지 않는 시장주도형 경제체제로 나아가 기업 내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하여 대량고객형 산업구조가 형성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개방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저축성향이 낮아 주가가 회복되면 소비를 늘리고 사치품을 사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산업의 경쟁력도 약하기 때문에, 시장을 개방하면 살아 남을 수 있는 기업이 과연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그가 한국 경제를 잘못 본 점이다. 한국 경제는 그 동안 개방이 너무 안 된 것이 문제였다. 일부 건전하지 못한 과소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의 저축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지금은 개방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되새겨 본다면 개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인허가권을 쥐고 특정기업을 선택하는 정책으로부터 탈피하여 내부적으로 자유화하여 상호경쟁을 통해서 자생력과 경쟁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장개방과 관련해서는 주식시장의 개방이 좀 빨랐다고 생각된다. 주식시장은 실물경제를 반영하는데 실물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식시장에 들어오는 자금은 단기성 투기자금으로 시장불안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 특히 주가상승을 통해서 불황을 극복하겠다는 사고는 경제의 체질강화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구조조정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난 뒤에 주식시장을 개방해야만 바른 순서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 일본과 상이한 독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걸릴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문화나 교육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엔지니어가 많아야 하는데 한국은 일본이나 대만과 달리 전통적으로 인문사회계가 강하고 이공계가 약하고, 소프트웨어나 서비스에서 승부하는 정보화사회로 옮겨가기 위한 수학이나 영어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인문사회계, 특히 법과가 강한데,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이 관료사회로서 실력보다는 연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경제운영의 기조를 정부주도에서 시장주도로 바꿀 때 실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고 자연히 유능한 엔지니어도 많이 배출될 것이다.

오마에 겐이치의 외환위기, 재벌정책, 산업정책 그리고 교육과 문화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첫째는 정부의 개입이 지나쳤고, 둘째는 정부가 비전제시, 시장경제원칙의 적용, 정치권의 경제 불개입, 민주화와 같이 해야할 것은 하지 않고 빅딜, 부채비율 200퍼센트와 같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함으로써 경제를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자유화가 추진되는 정보화시대이다. 정부는 정책의 초점을 기업을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것에서부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기업을 화학적으로 변하게 하는 제도변화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노부호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이머지 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999.10.1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