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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M&A를 ‘문어발 확장’으로 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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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한택수
국제금융센터 이사장

198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총저축이 총투자를 초과함에 따라 이른바 ‘저축잉여’가 매년 쌓여 왔다. 이렇게 과거 30년간 누적된 저축잉여금은 명목금액 기준으로 약 22조 달러에 달한다는 추계가 있다.

 엄청난 저축잉여금이 지속적으로 누적되기 시작하면서 80년 이후 세계금리는 명목금리와 실질금리 모두 뚜렷한 추세적 하락세로 반전됐다. 80년 연 14%였던 장기 명목금리는 최근에는 4% 수준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자금수급 구조상의 추세적인 변화로 인해 기업경영 및 금융환경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됐다. 미국·유럽 등 글로벌 기업들의 주도에 의한 활발한 기업의 인수합병(M&A) 붐이 바로 그것이다.

 신흥경제권의 신생기업들과는 달리 나이를 많이 먹은 선진국의 기업들은 설령 글로벌 규모의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자체적인 경쟁력이 둔화되는 추세다. 또 시장이 성숙됨에 따라 내연적인 성장에는 한계를 느끼게 됐다. 이 때문에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자금이라고 하는 금융환경의 변화를 타고 성장 잠재력이 있는 경쟁기업이나 다른 업종의 기업을 인수해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과거 경제성장을 처음 시작하던 60년대 후반부터 97년 외환위기를 맞기까지는 국민소득계정상 총투자가 총저축을 늘 초과했다. 항상 ‘저축 부족(이른바 Savings Gap)’ 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97년 이후부터는 상황이 크게 반전됐다.

 이때부터는 추세적·지속적으로 저축이 투자를 초과는 저축잉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매년 저축잉여가 누적되고 있다. 97년 이전에는 20% 수준을 넘던 명목금리도 6% 내외로 급격히 낮아졌으며, 시중에는 유동성이 넘쳐나고 있다.

 이와 같은 거시경제적인 자금수급 구조의 변화나 금융환경 등을 감안해 볼 때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기업들도 M&A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하나의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외환위기 당시 수많은 외국기업과 금융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M&A 시장에 뛰어들어 엄청난 이익을 실현한 사례들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이젠 M&A라고 하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새로운 성장잠재력을 확보하려는 우리 기업들의 확장욕구를 이해해 줄 때가 됐다고 본다. 과거처럼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난을 조건반사적으로 꺼내 들 때는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부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과거 외환위기 이전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부는 그동안 산업 구조조정이나, 민영화 또는 부실기업 매각이라는 명분으로 기업의 M&A 시장에 직·간접으로 계속해서 개입해 왔다. 하지만 아직도 민간기업들의 자율적인 M&A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정서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남과 같은 조건의 기회를 우리 기업들에도 제공해야만 한다.

 최근 금융당국자들이 금융회사들에 미칠 불안요소를 우려해 ‘승자의 저주’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M&A에 참여하는 국내 금융회사에 대해 보다 엄격하고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적용해 간접적으로 ‘승자의 저주’를 피해가도록 하는 슬기로움을 당부하고 싶다. 기업은 확장하는 게 본업이라 할 수도 있다.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는 이에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기업의 M&A는 곧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과거의 부정적인 트라우마는 이제 잊어도 될 때가 왔다고 본다.

한택수 국제금융센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