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기사와 광고, 불편한 동거 100여 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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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독립신문 창간호 3면. 지면 상단의 3분의2까지는 광고로, 하단은 우체시간표와 ‘잡보 계속’이라는 기사로 채워졌다. 광고는 박스로 처리했으나 ‘간다더라’로 끝나는 기사와 ‘많이 있더라’로 마무리되는 광고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지면 하단으로 밀려난 광고는 ‘눈에 띄기’ 위한 기법들을 개발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두고 기사와 경쟁했다.

1883년부터 1884년 사이에 조선 정부는 신(新)문물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기기국·연무국·전운국·전환국·광무국·우정국 등 여러 ‘국’을 설치했다. ‘국’은 오늘날의 국영 기업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문 발행과 출판 사업을 담당한 박문국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1884년 말의 갑신정변 이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조선 내정과 외교를 좌지우지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선 정부의 근대화 사업을 여러모로 방해했다. 그에 따라 대다수 국영 기업체들이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는데, 특히 박문국은 구독료 징수마저 여의치 않아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1886년 2월 22일, 박문국은 독일 상사(商社) 세창양행에서 운영비 일부를 지원받고 한성주보 지면 두 면을 내주었다. 해당 지면에는 ‘덕상(德商) 세창양행 고백’으로 시작하는 글이 실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광고였다. 그러나 몇 달 뒤 한성주보와 함께 신문 광고도 일단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는 사고(社告) 외에 여섯 건의 광고를 실었다. “각색 외국 상등 물건을 파는데 값도 비싸지 아니하더라. 각색 담배와 다른 물건이 많이 있더라.” “세계지리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마다 볼만한 책이니 학문상에 유의하는 이는 이 책을 종로 책전에서 사시압. 값은 여덟 냥.” 앞의 것은 일본 회사인 주지회사의 영업 광고고 뒤의 것은 『사민필지(四民必知)』라는 책 광고다. 이 뒤로 광고는 기사와 더불어 신문의 양대 구성요소가 됐고 비중도 계속 늘어나 근래에는 광고가 전체 지면의 반 가까이를 점하는 신문도 드물지 않다.

 신문 광고는 처음 개업 안내나 주주 모집 등 ‘사실’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곧 신상품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사실’이 생명인 기사와 ‘과장’이 속성인 광고는 본래 서로 어울려서는 안 됐지만 부득이 한 지면에 공존했다. 믿을 수 있는 부분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부분을 판단하는 책임은 독자의 몫이었다. 독자들이 영리해지자, 광고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았다. 그림과 사진을 집어넣어 직관에 호소하기도 했고 기사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광고 기법은 기사 편집 기법보다 더 빨리 발전해서 차츰 기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옛 사람들은 “신문에서 봤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의심을 거둬들였지만, 요즘 사람들은 기사에도 으레 꾸밈이 있으려니 생각한다. 기사가 광고와 한 지면에서 오래 동거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닮아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