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노인 쌀독 채우는 울산 대송동 우렁각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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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동구 대송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22일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주민이 보내온 쌀을 ‘사랑의 쌀독’에 붓고 있다. [울산=이기원 기자]

울산시 동구 대송동 주민센터 입구에는 ‘사랑의 쌀독’이라고 적힌 항아리 하나가 있다. 20㎏짜리 쌀 2부대쯤 들어가는 크기다. “형편 어려우시면 퍼가세요. 이용자 자격에 제한이 없고, 신분증이나 재산증명서도 필요 없으니 걱정 마시고….” 22일 반쯤 찬 쌀독을 열어보며 두리번거리자 쌀독 관리자인 윤성복 대송동 주민자치센터 계장이 다가서며 건넨 말이다. ‘20㎏ 한 부대면 4만원, 여기서 쌀을 가져다 팔아서 수지 맞추는 사람도 있겠지….’ 순간적으로 스치는 기자의 생각을 꿰뚫듯 그의 말이 이어졌다. “퍼 갈 수 있는 양에 제한은 없어요…. 그런데 이용자 대다수가 한 번에 1~2되(2~4㎏)쯤만 가져가던데요. 다음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갈까 봐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를 배려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 해도 20명만 쌀을 퍼가면 꽉 채워둔 쌀독도 텅 비게 마련이니 주민이 쌀 가지러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날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5년 전 사랑의 쌀독이 이곳에 처음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밑바닥을 보인 적이 없었다. “쌀독이 반 정도 빌 때쯤이면 어김없이 대송동 주민 누군가가 몰래 채워 놓곤 하죠. 이들 모두가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위한 우렁각시가 된 거라고 봐야지요.”

 이곳에 쌀독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6년 3월 18일. 주민자치위원 19명이 “온 동네에 사랑의 바이러스를 퍼뜨려 보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다. 당시 주민자치위원장을 맡았던 최병훈(53)씨는 “여유가 있는 동민에게는 ‘십시일반 쌀 모으기 봉투’를, 독거노인 등 차상위계층 가정에는 ‘끼니 걱정을 덜도록 주민센터에서 쌀을 준비해 놨다’고 안내했다”고 말했다. 용두사미가 될까 걱정도 적지 않았다. 일반 가정에 쌀 모으기 봉투를 계속 돌리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최씨는 “서너 달 뒤부터는 한동안 주민자치위원, 통·반장들이 대부분의 쌀을 부담하면서 버텼어요. 그런데 6개월쯤 지나자 익명의 개인이 한 명, 두 명 힘을 보태기 시작하면서 애초의 걱정이 기우(杞憂)였다는 게 확인됐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사랑의 쌀독 채우기에 단골로 동참하는 동민은 줄잡아 100여 명. 사랑의 쌀독이 생기기 전인 2004년부터 연말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수십 부대씩의 쌀을 기부해온 주민도 사랑의 쌀독을 채우는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21일에도 20㎏짜리 쌀 10부대를 배달원을 통해 주민센터에 보내 쌀독을 가득 채웠다.

 쌀독에 채워지는 쌀의 양은 연간 약 1000㎏. 퍼가는 주민은 주로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어도 수년째 연락이 끊어진 차상위계층 노인 20여 명이라고 한다.

 5년째 사랑의 쌀독에 의지하고 있는 이모(72) 할아버지는 “있는 사람들이야 쌀값이 별것 아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겐 쌀독이 없으면 당장 굶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며 “누가 도와주는지도 모른 채 퍼가기만 하는 것이 부끄럽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다”고 말했다.

 김옥만 대송동장은 “사랑의 쌀독은 이웃사랑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고 말했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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