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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토크]소유할 수 없는 시계

중앙일보

입력

명품시계에도 여러 브랜드가 있다. 롤렉스, 오메가, 브레게, 오데마피게, 예거 르 쿨투르, 바쉐론 콘스탄틴, 브라이틀링, 태그호이어 등등. 내로라하는 이 많은 시계들의 랭킹은 어떻게 매길까. 어느 한 요소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그렇지 않다. 연륜과 장인정신, 기술적 우월성, 디자인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브랜드 가치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요소를 하나의 파워로 빚어낼 수 있는 스토리텔링도 중요하다.

고급품의 경우 실상 품질의 차이는 미미할 수도 있다. 정밀 시계가 시간이 틀리거나 고장이 자주 나는 경우는 요즘 거의 없다. 시간의 정확도는 다 거기가 거기다. 기술적 우수성도 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최상품끼리는 그 작은 차이를 따진다. 예컨대 우리 시계는 하루에 1초도 틀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하루에 2초가 틀린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랴. 하지만 장인들 세계에선 그걸 놓고 경쟁한다. 초를 놓고 다투는 것이다. 방수 기술에서도 비슷한 싸움이 벌어진다. 이 시계는 100m까지 방수가 된다고 선전하면 다른 시계는 300m까지도 끄덕없다고 치고 나온다. 우리가 살면서 시계를 차고 수심 100m 아래로 내려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지만 경쟁사가 수심 1000m에도 견딘다고 나오면 그만 못한 제품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게 마련이다.

명품들은 그렇게 전문가끼리의 경쟁이다. 이긴 자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그 사실을 자랑한다. 숙련된 기술자들의 손재주와 정성으로 경쟁사를 압도했다고. 스위스 시계장인 길드가 그런 평판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제품마다 기술의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평가가 입소문을 타고 나가 시장에서 랭킹이 매겨진다. 고객들은 그들의 끈질긴 장인정신을 산다. 그들이 정성으로 빚어낸 브랜드의 품격을 구입함으로써 자신의 품격도 높이고자 한다.

여러 요소를 다 감안한 것이 랭킹이고 그것은 대체로 가격 순위와 비슷하다. 하지만 가격이 모든 요소를 객관적으론 반영할 순 없다. 2천만원짜리 시계의 품질이 1천만원짜리보다 배나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이치다. 가격의 차이가 품질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가격이라는 게 메이커가 맘대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맘대로가 아무렇게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납득하지 못할 가격의 상품은 시장에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부터 어떤 가격정책을 가져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300만원 안팎의 시계를 주로 만들던 회사가 어느날 갑자기 2000만원짜리를 내놓으면 시장에서 먹히기 힘들다. 어떤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어느 수준으로 한번 자리매김하면 그걸 바꾸기는 매우 힘들다. 현대차가 요즘 국내외에서 잘나가고 있지만 누구도 현대차를 럭셔리 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계도 마찬가지다. 명품 중에서도 최상급, 상급, 중급, 중하급 중 어느 한 곳으로 포지셔닝된 뒤에는 그걸 뒤집기 참 어렵다.

그런 점에서 파텍 필립의 포지셔닝은 부럽다. 기술자들과 시장에서 다 최상품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파텍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독보적인 기술과 끊임없는 혁신이다. 스위스의 명품시계 브레게는 파텍필립보다 역사가 114년이나 오래됐다. 그런 브레게도 "우리가 기술력으로 경쟁할 브랜드는 파텍필립 외엔 없다"고 말한다. 파텍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계의 기술은 무브먼트(시계 바늘을 움직이는 동력장치)에 있다. 파텍의 역사는 바로 무브먼트의 역사다.

1846년 세계 최초로 독립 분침을, 2년 뒤에는 세계 최초 자동 태엽을 개발했다. 날짜를 조정할 필요가 없는 영구 캘린더도 파텍 작품이다. 한 달의 짧고 긴 것은 물론 윤년까지도 다 계산해 돌아가는 시계다. 일출, 일몰, 12궁도까지 담은 천문학적 컴플리케이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루 동안 오차 범위도 단 2초에 불과하다.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칼리버 89'는 모두 1728개의 정교한 부품을 사용해 제작 시간이 자그마치 9년이 걸렸다. 2009년 나온 '5960 애뉴얼 캘린더'는 시계 기술의 결정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스위스 시계라면 '제네바 seal'(시계 부품에 대한 정밀도, 내구성을 12개 항목으로 측정해 통과된 제품에 붙이는 공인 마크)을 달아야 알아준다. 하지만 파텍 필립은 이것 대신 갻파텍필립 seal갽을 적용한다. 회사 측은 "우리는 제네바 실의 수준보다 훨씬 높은 기술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파텍의 모든 시계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시계 하나에 약 600개에서 1,000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하나를 완성하는 데 보통 몇년씩 걸린다. 장인의 혼이 충분히 영글 시간이다.

디자인은 심플하면서 클래식하다. 어찌보면 평범하게 보인다. 그들도 인정한다. "우리는 화려한 디자인을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다이얼의 문자, 바늘의 움직임 등 시계 자체의 기술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런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는 시계를 함부로 대하는 무례함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시계를 팔지 않습니다." 그들은 파텍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판매한다고 선언할 정도다.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 광고의 문구도 멋있다. "엄밀히 말해 당신은 파텍 필립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잘 관리하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뿐입니다."

심상복 기자(포브스코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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