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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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깬 뒤 잠이 오지 않아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였다. 급경사를 올라오는 차 소리가 부르릉, 들렸다. 302호실에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BMW302가 내는 비명소리였다. 손바닥을 제외한 내 몸의 감각들은 나날이 예민해졌다. 이를테면 청각의 경우, 이제 비탈길을 올라오는 차 소리만 듣고도 나는 누구 차인지, 차종이 무엇인지 감별할 수 있었다. 엔진이 꺼지고 곧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발소리였다. 여자를 동반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샹그리라에서 자주 여자와 동반해 들어오는 사람은 프로그래머뿐이었다.

나는 복도 쪽 창틈으로 가만히 내다보았다.
과연 프로그래머는 여자를 바짝 옆구리에 끼고 층계를 올라왔다. 어린 여자애였다. 이쁘고 날씬했다. 최근에 연거푸 데려오던 그 여자가 아니었다. 새로 작업해 얻은 전리품인 것 같았다. 그가 데려오는 여자들은 여고생인지 여대생인지, 심지어 여중생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한결같이 어린 여자애였다. 술을 마신 듯 여자애가 조금 비틀거렸고, 그러자 그가 바싹 여자애 허리를 안아 쥐었다.

나는 얼른 어둠 속으로 다시 쓰러져 누웠다. 부럽진 않았다. 나의 성적 기능은 오래전부터 소멸의 비탈길로 쓸려 내려와 이제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어떤 야한 상상을 해도 페니스는 늘 죽어 있었고, 성적 욕망도 생기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한때, 성적 욕망이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용광로 같았던 순간도 있었고, 입을 벌린 어스레한 수렁, 커다란 상처 같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제는 가난한 자의 영혼처럼 쓸쓸했다. 그 점에서 나는 성자(聖者)가 되었으며, 불만은 없었다. 나는 나의 성자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 소리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30여 분쯤 지난 후였다.
비명소리인지 전선줄에 목매다는 바람소리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곧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비명소리와 달리 그 소리는 바로 창문 밖에서 난 것 같았다. 나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귓구멍을 활짝 열었다. 안쪽 어느 방에선가 다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 내 방문을 마구 두들기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아저씨! 아저씨! 빨리 나와봐요!”
“사람인 것 같아요. 사람이 떨어졌다구요!”
앞의 목소리는 202호 슈퍼마켓이었고 뒤의 목소리는 206호 화장품 할인매장 여자, 노랑머리였다. 둘이 한 방에 있다가 튕겨져 나왔나 보았다. 문을 열고 나오자, 반라의 슈퍼마켓이 창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감의 바늘이 순간적으로 비등했다. 나는 쏜살같이 층계를 내려와 주차장을 지나서 샹그리라 건물의 뒤쪽 마당으로 달려갔다.

여자애가 어두컴컴한 뒤란에 떨어져 있었다.
죽은 것 같진 않았으나 어디가 부러지고 부서진 모양이었다. 여자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버르적거렸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싸안고 3층으로 올라간 어린 여자애였다. 슈퍼마켓이 119에 전화를 하고, 프로그래머와 207호실의 젊은 순경이 달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프로그래머가 사람들을 향해 황급히 손을 저었다.

“나… 아… 아무 짓도 안했어요… 갑자기… 그냥…….”
프로그래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울먹이며 말했다.
젊은 순경이 여자애를 살피고 있었다. “빨리 병원으로…….”하고 노랑머리가 말했고, “어디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올 때까지 가만 둬야 해요.”라고 젊은 순경이 대꾸했다. 버르적거리는 여자애한테서 술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백주사가 내려온 것은 잠시 후였다. 백주사는 말없이 프로그래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여자애를 살핀 구급대원의 수신호를 받은 대원들이 곧 들것을 내렸다. 여자애의 입에서 풀무질하는 듯한 고통스런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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