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경제까지 바꾸는 영화제 특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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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208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을 두고 흔히들 '영화의 바다'란 소리를 한다. 그러나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영화제 기간은 '지옥(?)'의 한철이 될 수 있다. 각종의 프레스 컨퍼런스, 감독·제작자와의 만남, 거기다 이른바 스타군단의 뒤까지 쫓아다니다 보면 영화 한편 제대로 관람하기란 실제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기자가 영화를 볼 수 없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영화제 현장이다.

기자들의 엄살은 믿거나 말거나, 부산의 영화축제는 행사내내 흥분된 분위기가 이어진다. 1회때부터 부산영화제를 성원해 온 전국의 영화팬 덕이다. 영화제 기간 극장가가 밀집돼 있는 남포동 일대는 걸어다니기 힘들 만큼 인파들로 북적인다. 부산 지역경제가 매우 안좋다는 소리가 들리지만 영화제 기간만큼은 예외다.

지난 해 영화를 보기 위해 부산을 찾은 부산지역외 순수 일반관객들은 전체 관객수의 10% 정도. 영화관계자, 외국 게스트까지 포함한 전체 관람객수는 20만명 정도였다. 영화제 사무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부산시민들은 영화제때 평균 4만원, 나머지 사람들은 12만원 정도를 썼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일인당 평균 8만원 정도를 쓴 셈이고 전체적으로는 160억원의 돈이 된다.

영화제를 소비적인 행사의 하나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수치는 좋은 교훈이 된다. 한마디로 영화제는, 부산영화제만큼은 돈이 되는 행사인 것이다. 하지만 산술적인 수익만을 생각하면 안된다. 부산의 경우 올해만 해도 영화제때문에(비록 간접적인 영향이긴 하지만) 극장시설들이 대폭 개선됐고, 호텔을 포함한 각종 숙박시설과 교통시설 등이 발빠르게 보충됐다. 눈에 안보이는 부가가치 창출은 1-2백억원의 돈보다 훨씬 더 이익이 된다.

부산시가 아예 지역경제 구조를 영상산업 위주로 바꾸겠다고 나선 것도 뭔가 남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는 판단때문이다. 부산 안상영시장은 영화제기간 기자회견을 자청해 내년 1월1일부터 "부산영상위원회"를 가동한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는 부산에서 벌어지는 국내의 각종 영화제작 현장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는 기구다. 촬영에서 현상 등 후반작업 일체까지 이른바 원스톱 서비스 체제가 이 영상위원회를 통해 갖춰지게 되는 것이다. 일개 영화제의 성과가 지역경제의 틀까지 바꾸고 있다.

영상위원회의 출범으로 부산영화제의 여건은 더욱 빠른 속도로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도와줘야 할 일은 아직,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이 전용관 문제다. 칸과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유수영화제들은 모두 전용관을 갖추고 있다. 부산이 아시아권 영화계의 맹주로 급부상하고 있다지만 전용관이 없는 지금 실정은, 마치 얼굴 마담없는 국제영화제 꼴이다. 전용관이 없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불편함은 당장 영화제 기간이 매해 들쭉날쭉 편차가 생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지난 해 9월에 열린 영화제가 올해는 10월에 열렸다. 이른바 추석 대목시즌을 맞는 극장사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기간을 내세워 홍보하지 못하는 한 국내 관객들은 차치하고라도 외국 영화팬들을 부산으로 끌어 모으는데 혼선이 생긴다. 실제로 지난 해 9월 푹푹찌는 늦더위에 고생했던 외국 영화관객들은 올해, 여름 얇은 옷을 입고 왔다가 추위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이런 식으로라면 관광수입 측면에서도 하자가 생긴다.부산영화제가 세계적인 행사로 보다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전용관 건립을 추진해야 할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와 정부의 적극적인 사고전환이 필요할 때라는 지적이다.

▶영화만들기 어려움은 유럽도 마찬가지?

영화제에서 만난 외국감독들도 하나같이 영화만들기의 어려움을 토로해 필자를 조금 놀라게 했다. 필자는 평소 한국만큼 영화만들기가 어려운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원칙없는 심의, 자본의 열악함 등등. 그러나 외국, 특히 영화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감독 혹은 제작자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인상적인 대목들을 정리한다.

레지스 바르니에 - 프랑스. 〈이스트 웨스트〉 감독.
"프랑스 영화제작 자본의 75%는 방송자본, 곧 까날 쁠뤼의 돈이다. 때문에 프랑스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고민한다. TV는 영화의 친구이자 적이다."

주느비에프 졸리프 - 영국. 〈도시괴담〉감독.
"감독들이 해외영화제에 초청받을 때는 보통 그 나라의 영화제 주최측으로부터 숙박을 제공받고, 비교적 좋은 호텔에 머물 때가 많다. 그런데 국세청으로부터는 마치 영화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인 것으로 오해받을 때가 많다. 한번은 그런 오해때문에 세금 추징의 위협과 심지어 유치장에까지 들어간 적이 있다. 김동호위원장께서는 내가 이번에도 그런 오해를 받지 않도록 미리 보증서같은 것을 써달라."

다니엘 쉬마트 - 스위스. 〈베레지나 또는 스위스의 종말〉감독.
"스위스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14개의 위원회 심사를 거쳐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더욱 끔찍한 일은 그 위원회 관계자들 가운데 영화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유럽감독들의 하소연은 오히려 듣는 이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동병상련이 작용한 탓일까? 이 가운데 레지스 바르니에감독의 마지막 말은 이들 감독의 마음을 대변했다고 본다. 바르니에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영화 일로는 주로 미국에 많이 갔다. 미국을 갈 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면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부산을 오면서 생각하니 밑에는 바다 대신 광활한 아시아의 대륙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 아시아 친구들과 손잡고 영화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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