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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문화예술 공연계의 대부 이종덕 전 성남아트센터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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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덕(75) 전 성남아트센터 사장. 일반인에겐 다소 낯설지만 그는 가장 존경받는 공연계의 어른이다. 별명도 많다. ‘공연계 대부’ ‘예술행정의 달인’ 등. 업무 추진력이 강해 ‘불도저’로도 불린다. “혹시 우락부락한 생김새 때문에 붙은 거 아닐까. 하하.” 껄껄 웃는 모습이 혈기왕성한 청년 같다. 할아버지보단 여전히 통 큰 사나이 같은 이씨가 현업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달 30일, 성남아트센터 사장 6년 임기를 꽉 채우고 퇴임하면서다. 1963년 문화공보부 문화선전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해 서울예술단장·세종문화회관 사장·예술의전당 사장 등을 거친, 47년 무대 뒤 인생과 작별을 고한 셈이다. 유인촌 장관은 “영화계에 김동호 위원장이 있다면, 공연계엔 이종덕 사장이 있다”란 말을 자주 한다.

글=최민우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어떻게 공연과 인연을 맺게 되신 건가요.

 “공무원이 돼서죠. 학창 시절엔 딱히 문화니, 예술이니 이런 것과 거리가 멀었어요. 저만 그랬나요, 1960년대 한국인에게 예술 향유란 사치였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도 궁핍했고요. 공무원이라고 현장 돌아다니며 예술가들과 밤새 술 마시면서 친해지는 사람도 한두 명 생겨났죠.

 그러다 72년이었어요. 한국민속예술단이 독일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럽과 중동·아프리카·동남아의 24개국을 4개월간 순회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해외 공연에 나섰어요. 그 인솔 책임자를 제가 했습니다. 그때 공연에 제대로 눈을 떴어요. 운명적인 사건도 있었고.”

●운명적인 사건이라뇨.

 “3억7000만원이나 되는 돈을 잃어버렸어요. 4시간 만에 찾았지만, 지옥이었죠. 총무 담당 직원이 현금과 여행자수표가 든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렸고, 새벽에 정산 회의하다 그때야 가방이 없어진 걸 알았어요. 허겁지겁 버스 주차장으로 달려갔지만, 한밤중이라 철문이 잠긴 상태였고, 그 담당 직원과 함께 템스강까지 터벅터벅 걸어갔죠. 집 한 채 값이 1000만원 하던 때였어요. ‘버스기사가 가방 가지고 달아나지 않았겠냐. 우리 여기서 그냥 빠져 죽자’며 한바탕 난리를 쳤죠. 강을 내려다보니 물이 새까맣고 아득했어요. 그때 기도했죠. ‘돈만 찾으면 평생 공연 쪽을 위해 헌신하겠다.’”

1974년 공연계장이던 이 전 사장이 주도한 정명훈씨의 카 퍼레이드. [중앙포토]

●지휘자 정명훈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1974년 차이콥스키 음악콩쿠르에서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정명훈씨가 1위 없는 2위를 했어요. 실제론 금메달 딴 거죠. 대한민국 국력이 약하니깐 당시 소련이 1등 주기 싫어 그렇게 한 거죠. 한국 예술 역사상 최초의 일이에요. 당시 제가 공연계장이었는데,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직접 청했어요.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스포츠 선수들, 카퍼레이드하지 않나. 예술에서도 그런 걸 해야 일반인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고요. 허락을 받고 한국일보를 찾아가 미스코리아가 타던 오픈카 두 대를 빌렸죠. 김포공항부터 카퍼레이드해서 시청까지 왔고, 시청 앞에 대형 아치 세웠고 팡파르 울리고 1000여 명 모여 그럴듯하게 기념식 했어요. 대한뉴스에도 나오고 꽤 화제가 됐죠. 예술가가 처음으로 전국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시초가 됐어요.”

●친하신 예술가가 한두 분이 아니겠어요.

 “서울예술단장 할 때 ‘한강은 흐른다’란 작품 지방 공연을 몇 개월 했는데, 주인공을 유인촌씨가 했어요. 그땐 제가 멘토였는데 20년이 지나서는 유 장관이 저의 상관이 된 거죠. 스타가 되기 전부터 김덕수·안숙선씨와는 친형제·남매처럼 친했고요. 누구보다 제게 강렬한 기억을 준 사람은 박범훈 중앙대 총장입니다. 72년 세계 순회공연 당시 박 총장은 그저 평범한 피리 반주자였어요. 가는 나라마다 그 나라의 민속음악을 해야 반응이 좋은데 그걸 몽땅 박범훈씨가 해내더라고요. 생판 모르는 음악이잖아요. 그걸 빠른 시간에 익히고, 악보를 채보하고, 전문가를 만나 연습해 그럴듯하게 재현해 냈습니다. 그 꼼꼼함에 저도 혀를 내둘렀죠. 본인으로선 그렇게 해외를 돌아다닌 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해요. 귀국 후에 작곡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예술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그렇게 한발 한발 쌓아 올라가 연주자를 넘어 대학의 총장까지, 이런 인간 승리가 어디 있겠어요.”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 사장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분이시잖아요. 임기도 다 채우셨고.

 “주요 극장마다 아찔한 사건이 하나씩 있어요. 서울예술단장 시절엔 국립극장에서 ‘꿈꾸는 철마’라는 공연 리허설 도중 기차 무대 세트가 무너졌어요. 십여 명이 다쳐 다섯 군데 병원에 입원했고, 난 통닭 사 가지고 병원 쭈욱 돌아다니며 병문안 다니기 바빴죠. 1997년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야간공사 도중 스프링클러가 터져서 물바다가 됐는데, 바로 다음 날 공연이 있는 거예요. 어떡해, 물 빼느라 밤 새웠죠. 2001년엔 세종문화회관에서 리허설하다 불이 났어요. 총에서 나온 화약이 벽면에 붙은 거죠. 내 방에서 모니터하다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 ‘불이야!’라고 가장 먼저 외치며 나왔어요. 불 나고, 물 터지고, 무대 무너지고…. 근데 공연은 제때 정상적으로 다 올라갔어요. 그건 기적이에요.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게지.”

 이 전 사장의 성격은 둥글둥글하다. 반면 일할 때는 180도 달라진다. 성에 안 차면 눈물 쏙 빼낼 만큼 직원을 매섭게 혼낸다. ‘얼마나 무서워할까, 슬금슬금 피하겠지’ 싶었다. 근데 웬걸. 그가 퇴임식을 하던 지난달 30일, 공식 행사 전부터 몇몇 직원의 눈은 이미 벌게져 있었다. 직원 중 한 명이 송사(頌辭)를 읽었다. 그저 숙연한 정도가 아니었다. 꺼억꺼억 소리를 내는 남자도 있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이종덕 사장님이 우리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간 낳고 키워주던 부모로부터 우리가 독립하는 자리라는 것을요. 살아가면서 부모의 은혜가 새록새록 감사하고 깊이 와 닿는 것처럼, 앞으로 일하는 과정마다 사장님과 일했던 지난 시간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얼마나 큰 경험이었는지, 두고두고 감사하게 될 것 같습니다.” 퇴임식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언제나 무대 뒤에 계셨습니다. 무대 앞으로 나오고 싶진 않으셨나요.

 “그것도 체질이죠. 뻔한 얘기 같지만 누군가의 소금이 되고 촛불이 되는 게 저의 숙명 아닐까 싶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생전에 계셨을 때 당신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셨죠. 그 말씀만큼 가슴을 치는 말이 없더군요.”

●1세대 예술경영자이자 공연행정가로서, 공연장을 운영함에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당연히 관객과 예술가입니다. 소비자인 관객이 얼마만큼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지, 공급자인 예술가가 얼마나 최상의 컨디션에서 무대에 서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일이죠. 그것과 관련해선 어떠한 타협도 있어선 안 됩니다.”

●공연계에서 사장님을 욕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이의 청탁도 있었을 것 같은데.

 “ ‘대관해 달라’며 사무실로 찾아오는 분이 많죠. 전 공수표를 남발하지도 않고, 매몰차게 돌려보내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무 담당자에게 바로 전화합니다. 대부분은 ‘어렵다’라는 대답이 돌아오죠. 결과도 좋으면 좋지만, 더 중요한 건 과정이겠죠. 진심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면 사람의 마음은 통하리라 믿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지나가는 말처럼 “무탈하게 은퇴하시는 게 가장 큰 축복 아닐까요. 굳이 아쉬운 일을 하나 꼽자면…”이라고 물었다. 실수였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던 이 전 사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제가 2대 독자입니다. 딸만 넷이었죠. 아들을 하나 꼭 갖고 싶었습니다. 애들 엄마도 별의별 짓 다 했습니다. 그 덕인지 1973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뛸 듯 기뻤죠. 그 아들이 아홉 살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렇게 세상을 떴습니다. 신부님이 그러시더군요. ‘가브리엘(이 전 사장의 세례명)이 하도 원해서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내보내 아홉 살까지 기르도록 해주었다. 아들을 기르는 기쁨을 알게 한 후 다시 거두어가신 거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들은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간 것뿐이다.’”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사고를 낸 운전기사의 아내가 저를 찾아와 눈물로 호소를 합디다. 합의를 해줘야 남편이 감옥에 가지 않는다고. 전 그 자리에서 사인해 주면서 ‘다시 오지 마라, 마음 바뀔지 모른다’라며 바로 자리를 일어났습니다.”

 퇴임을 하고도 그는 바빠 보였다. 워낙 리더 본능이 있는 터라 대여섯 군데 모임과 포럼을 주도하는 건 늘 그였다. 그중에서도 이 전 사장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건, 한센병 쉼터인 ‘성 라자로 마을’ 후원 일이었다. 아들이 태어난 이듬해 ‘그대 있음에’라는 성 라자로 마을 돕기 음악회를 만들었고, 아들이 죽은 뒤 더 정성을 기울여 왔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정신 없이 뛰어온 거, 주변과 무언가를 함께하려 발버둥쳐온 거 모두 죽은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녀석, 아직 고운 모습이겠죠.”

j 칵테일 >> “대학 시절 힘 좀 썼죠”

75세임에도 이 전 사장은 여전히 건장하다. 그는 경복고 시절 유도 선수였고, 연세대에 진학해선 레슬링을 했다. 운동을, 그것도 격투기를 하다 보니 거친 사람들과 어울릴 일도 늘어났다. 당시 1950년대 중·후반은 서울 중심가에 정치 깡패들이 활개치던 시절. 종로와 광화문에서 활동한 심종현(일명 아오마스), 동대문과 종로4가의 유지광, 서대문의 최창수 등 세 명이 ‘화랑 동지회’를 만들었고, 그 맨 위에 이정재가 있었다. 청년 이종덕은 광화문 거리패와 친했다.

 대학 2학년 때 군에 입대했지만 꾀병을 부려 당시 경복궁 맞은편에 위치한 육군수도통합병원에 ‘나이롱 환자’로 입원했다. 툭하면 병원을 빠져나와 금강제화 뒷골목에 있는 ‘황정유’란 커피숍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제극장 앞에서 패싸움이 벌어졌고, 거기서 그는 쇠파이프에 얻어맞아 기절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의 오른쪽 이마는 움푹 들어가 있다.

 깡패와 인연을 끊게 된 건 57년 ‘장충공원 정치테러’ 사건 때였다. 조병옥 박사 등 야당 정치인들의 정견 발표를 막기 위해 이정재는 주먹들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가 속한 대학생 패거리들은 “정치까지 관여하다간 큰일 난다”며 빠져나갈 궁리를 짰다. 결국 40여 명이 택시 10대에 나누어 타고 장충공원으로 가다 중간에 옆길로 새 달아났다. 보복이 두려웠지만 사건의 주동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그 역시 주먹의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종덕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경복중·고교와 연세대 사학과를 다녔다. 1963년부터 20년간 문화공보부의 보도담당관·공연과장·종무담당관을 거친 뒤 서울예술단 단장,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성남아트센터 사장 등을 지낸 한국 공연계의 대부이자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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