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민주주의는 죽었다” 수만 명 거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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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현지시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불신임을 묻는 의회 투표에서 재신임 받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이날 로마에서는 약 300대의 자동차가 불에 탔으며 시위대와 경찰 100여 명이 다쳤다. 밀라노와 토리노 등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로마 로이터=연합뉴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4) 이탈리아 총리가 의회 불신임 투표에서 극적으로 정치생명을 건졌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국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다. 의회에서는 총리 측이 의원들을 매수했다는 ‘공작정치’ 의혹이 제기됐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총리와 의회를 동시에 규탄하고 있다. 14일(현지시간) 하원 투표에서는 불과 3표 차이로 불신임을 모면했다. 집권세력의 의회 기반이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후 긴축재정과 관련한 법안 등이 의회에 상정될 때마다 불안한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크다. 지지 의원의 추가 이탈로 머지않아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외신들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이 유럽 경제에 새로운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의회 표결 직후 이탈리아 수도 로마는 전쟁터로 변했다. 수만 명이 도심에서 차량 방화와 경찰관 집단 폭행 등의 과격 시위를 벌였다. 정부의 교육예산 삭감에 반대해 가두행진을 벌이던 학생 시위대에 총리 신임 결정에 실망한 시민들이 합세했다. 외신들은 시위대에서 “민주주의는 죽었다”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이 창피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했다. 이날 시위로 로마에서만 시민·경찰관 등 100여 명이 다쳤고 약 300대의 자동차가 불에 탔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살포하며 40여 명을 체포했다. 지아니 알레마노 로마시장은 “1970년대 이후 로마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시위”라고 말했다. 밀라노에서는 시위대가 주식거래소에 난입했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는 500여 명의 학생이 공항 활주로를 점거해 항공기 운항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토리노에서는 중앙역이 마비됐다.

 시위대는 베를루스코니가 불신임 투표 전날 집권당 의원들과의 만찬에서 특유의 성적 농담을 하며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였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흥분했다. BBC에 따르면 그는 “나는 상대방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다. 예전부터 그래 왔다. 지금까지 동성연애자가 나를 유혹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모로코 국적의 미성년자와 성적인 접촉을 가졌다는 의혹 때문에 불신임 투표라는 막다른 골목으로까지 몰렸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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