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걸 크리스마스 화보 촬영 동행기] “촬영전에 얼어죽겠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대기하는 것은 모델의 일이다

오후 2시, 한남동의 한 카페. 배트우먼으로 분장을 하기로 돼 있는 모델 박소연씨의 손에 핸드폰이 꼭 쥐어져있다.

“화보촬영은 옷을 갈아입거나, 조명을 설치하는 등 대기시간만 4-5시간이 걸려요. 짬짬이 핸드폰으로 친구와 연락도 하고 인터넷 고스톱게임도 해요”

4년차 모델이 대기시간을 보내는 노하우다. 모델 1년 차 백지원씨는 지난 해 한 잡지의 5주년 기념화보를 찍기 위해 만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했다.

“100여 명의 모델들이 출연했는데, 저보다 선배가 많아서 아침부터 계속 기다리기만 했어요. 대기하는 것도 모델의 일이죠”

탈의실이 없어 카페 화장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며, 백씨가 털어 놓은 말이다.

◆ 세계를 지켜야 하는데...

오후 4시 40분 경, 한남동의 한 호텔 앞 야외 촬영장.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수퍼걸과 원더우먼 분장을 할 박소연씨와 백지원씨는 스팽글이 달린 핫쇼츠와 재킷이 전부인 옷을 입고 있었다.

“세계를 구하기전에 먼저 얼어죽겠네요”

덜덜 떨고 있는 수퍼걸들을 보다 못한 헤어디자이너 이경숙씨가 한 마디 한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가 움직이자 수퍼걸들은 언제 떨었냐느듯 포즈에 몰입했다.

“포즈에 들어가면 카메라기자의 말소리만 들려요”

촬영을 끝낸 박소연씨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말한다. 2000만 원짜리 재킷이라는 말에 “그래도 비싼 옷보다는 따뜻한 옷이 좋다”며 웃는다.

◆ 오후부터 보이던 정체불명 남자는?

저녁 6시경, 다시 한남동의 카페안. 손님인 줄 알았던 한 남자가 가방 안에서 헬멧을 불쑥 꺼낸다.

“얘(헬멧) 한번 출연시키려고 3시간 넘게 기다렸잖아요”

그가 건넨 것은 크리스탈로 특수 제작된 헬맷으로 가격이 2000만 원에 달한다. 고가임에도 모델의 머리에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놓여 배경으로만 사용됐다.

촬영을 위해 의상, 헤어, 메이크업 등 15명 가량의 스탭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화보촬영장. 모델 백지원씨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화려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모델 한 사람만 보이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기에 그 한 장의 사진이 보여질 수 있는 거에요”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녀는 사진작가,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의 인적사항은 물론 그 신문이나 잡지의 스타일까지 꼼꼼히 공부해둔다. 현장의 특징을 파악하면 그 옷과 자신을 더욱 잘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모델은 배고프다?

저녁 7시 30분 경. 촬영이 끝난 후 박소연씨가 “행복해요, 삼겹살 먹으러 갈꺼에요”라고 말한다. 대전이 집인 그녀는 촬영을 위해 서울에 올라오느라 오늘은 한 끼도 먹지 못했다. 한편 백지원씨는 “다음 촬영을 위한 옷을 미리 입어보러 가야해요”라며 황급히 떠난다. 그녀에게는 밥보다 무대가 우선이었다.

이날 화보촬영에 보여진 옷의 가격은 수 천만 원에 달한다. 그만큼 섭외가 쉽지 않다. 촬영장을 구하는 일도 만만하지 않다. 촬영이 끝났을 때 기획을 맡았던 기자가 “이제 끝났다”고 소리를 지른 이유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사진기자에게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날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중 신문에 실리는 사진은 달랑 4장. 선별작업은 사진기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김정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