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의 서핑 차이나] 중국의 친구는 과연 몇 나라?

중앙일보

입력

14일자 중국 관영 신화통신사에서 발행하는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에 주목할만한 칼럼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중국은 동맹을 맺지 않을 수는 있지만, 친구를 사귀지 않을 수는 없다(中國可不結盟 但不能不交友)’입니다. 할 말은 맘껏하고 행동도 강단지게 하던 최근 중국의 외교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입니다. 필자는 ‘우리 중국의 국가적인 핵심이익이 도전 받는 중요한 시점에 과연 세계에서 몇 국가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필자는 중국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거나 있어도 변변치 않다는 뉘앙스를 던집니다. 다음은 해당 칼럼의 요지.

영국 가디언지는 최근 누출된 미국 외교 전문 가운데 한 미국 외교관의 언급을 폭로했다. 중국 외교가 근래 호전적으로 변하면서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친구를 잃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와 동시에 유럽의 외교관들은 사석에서 ‘과거와 비교할 때 중국 외교가 거칠고 오만해져 충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언급은 일부의 이야기이지만 세계가 중국 외교를 대하는 인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굴기함에 따라 중국 외교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계 각국의 관심의 초점이 된지 오래다.
지난 세기 70년대 아프리카의 형제들이 우리를 지지해준 덕에 UN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세계는 이미 변했다. 중국의 외교정책과 태도 역시 변했다. 하지만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중국이 세계라는 대가정에서 친구 없이 지낼 수는 없다. 우리가 가난하고 낙후했을 때 우리의 친구들은 전세계에 널리 있었다. 우리가 평화로운 굴기를 했다고 해서 친구들을 잃는 곤경에 처할 수는 없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까지 우리의 친구는 도합 얼마나 될까? 우리의 국가 핵심이익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중요한 시각에 세계 몇 나라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되새겨봐야 할 질문이다.
우리는 60년 동안 이미 많은 외교적 성취를 이룩했다. 중국 외교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함과 동시에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좋은 전통은 계승해야 한다. 중국이 더 많은 우호국가들과 사귀려면 어떤 외교적인 모습이 필요할까? 우리의 외교 이념과 방식에 어떤 조정이 필요할까? 만일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면 이 문제를 심각하게 토론해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외’교’의 첫째 임무다. 외교라 함은 사귀는 것(交)이다. 사귀지 않는 외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국이 굴기하는데 우호국가들의 이해와 신임, 지지가 없어선 안된다. 중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형제 같은 우의, 전천후 지지와 조화로운 세계라는 이념의 진가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이해와 찬성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는 친구를 떠나 지낼 수 없다. 친구는 우리가 세워나갈 대국외교의 기초다. 친구가 있어야 양호한 국제 환경도 생긴다.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떤 국가들과 우리는 교류와 합작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중국의 옛 친구들은 일련의 소국, 약국, 가난한 나라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중국 국제 역량’의 기초가 되고 있다. 국제정치에서도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소국과 약국도 국제 정치무대에서 더욱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국가는 크기, 빈부, 강약과 상관없이 서로 존중 받고 평등해야 한다.
중국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동맹군과 같은 노선을 걷는 나라가 없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외교가 전환기를 맞았다.
중국은 더 이상 ‘자기만 생각하고 집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세계가 ‘조화로운 세계’라는 이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변신을 도와줄 능력과 기회, 조건을 우리는 갖췄다. 외교 전문에 따르면 근래에는 아프리카 외교관들마저 중국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국 외교의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동시에 가장 걱정거리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겸손한’ 중국의 목소리입니다. 이 칼럼에 한국의 대중국 외교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한중관계의 돌파구는 이 ‘친구’에 있었습니다. 몽고의 쿠빌라이가 남송을 정벌하던 중 후계분쟁이 터졌을 때 골치거리이던 고려왕실이 쿠빌라이의 손을 들어주며 투항했습니다. 일종의 친구로서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후 원과 고려는 부마국으로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조선-청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후금을 모실 수 없다는 조선의 태도로 병자호란이 터졌지만 조선이 투항할 때의 시점도 만주족으로서는 중원을 정벌하기 직전 강력한 후원 세력, 즉 ‘친구’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조선은 만주족이 내민 손을 잡았고 이후 청과 조선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지난 92년 한중 수교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89년 천안문 사태로 전세계가 중국에 등을 돌렸습니다. 고립된 중국이 돌파구로 손을 내민 곳이 한국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한국은 중국을 물심양면 지원했고 한국과 중국은 친구가 됐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한중관계는 세계상 어떤 양자관계도 이루지 못한 실적을 냈습니다. 그런 중국이 다시 친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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