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신문고, 서민은 만져보기도 힘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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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영조의 어진. 영조는 1771년 폐지됐던 신문고를 건명문 밖에 다시 설치해 민의를 수렴하려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북을 울리자 신문고를 폐지하려 시도하기도 하고 북을 울릴 수 있는 사안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조처를 취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신문고가 처음 설치된 때는 1401년(태종 1)이다. 그 목적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음에도 호소할 길이 없는 사람들의 민원을 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본래의 취지와 달리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돼 있었다. 조선 초기의 경우 전·현직 관리나 그 인척이 대부분이었다. 일반 하층민이 신문고를 울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문고가 대궐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신문고가 위치한 창덕궁 안의 진선문(進善門) 부근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궐문을 지키는 관원들의 감시와 제지를 피해 대궐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신문고를 통해 역모 혐의자를 색출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411년 의도와 달리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전 장흥부사 김기(金<980E>)가 신문고를 울리자 태종은 그를 불러 사연을 물었다. 김기는 자신이 ‘1398년 정변 때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죽이는 공을 세웠음에도 공신이 되지 못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398년 정변이란 이복동생(방석)이 왕세자로 결정된 것에 불만을 품은 태종(이방원)이 사병을 동원해 방석과 정도전 등을 제거했던 ‘왕자의 난’을 가리킨다. 김기의 진술은 태종이 저지른 ‘골육상잔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곤혹스러운 내용이었다. 태종은 결국 김기를 국문해 진술 내용이 허위였다는 자백을 받은 뒤 유배에 처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고를 두드리는 사람들은 다양해진다. 여전히 양반들이 주를 이루는 와중에 1423년(세종 5)에는 함경도 경원 사람이 신문고를 울려 민원을 호소했다. 하층민들의 민원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려 했던 세종대의 분위기 덕분이었다. 그런데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1433년 사헌부는 “요즘 완악한 무리들이 관리들에게 불만이 있을 경우 ‘신문고를 울려 고발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사소한 일에도 소송이 줄을 잇고 풍속이 경박해졌다”며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조건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후 북을 칠 수 있는 조건을 엄격히 제한하고, 세조·연산군대를 거치며 신문고는 유명무실해졌다.

 신문고를 다시 설치한 임금은 영조였다. 그는 1771년(영조 11) 11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바깥에 신문고를 다시 세우라고 명했다. 신문고가 궐 밖으로 나온 것이다. 자연히 북을 치는 사람이 폭주했다. 그러자 겨우 한 달이 지난 같은 해 12월 영조는 신문고를 철거하라고 지시했다가 다시 번복한다. 위정자들은 민심을 중시해야 한다고 표방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