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욱의 경제세상

수렁에 빠진 현대건설 인수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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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아무리 푸념해도 두통이 가시지 않고, 남의 걱정에 내 골치만 아픈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건설의 진흙탕 싸움을 지켜보는 심정이 그러하다.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 채권단과 정부 모두가 두통을 호소하지만 고민을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다.

엊그제 매각주간사인 외환은행이 된통 당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현대그룹은 채권단이 우선협상 대상권을 뺏으려 한다며 법원에 ‘양해각서(MOU) 해지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입찰에서 떨어진 현대차그룹은 외환은행의 입찰 담당자들을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수렁이 깊어지고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매각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건 지난달 16일. 하지만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인수대금 5조5000억원 중 외부자금 2조원의 출처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였다. 현대그룹이 프랑스의 한 은행에 예치해놓았다고 주장한 1조2000억원이 특히 문제였다. 예금인지 대출금인지, 대출금이라면 현대가 담보를 제공했는지 등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외부자금 8000억원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순수한 출자금인지, 현대가 나중에 되사겠다는 바이백(buy-back) 조건이 붙어있는 건 아닌지 등이 해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채권단은 급기야 14일까지 관련 서류를 제출하라고 현대그룹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정확히 규명하지 않으면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단다. 현대그룹의 역공도 만만찮다. 입찰 규정도 지켰고, 자금 출처에 대한 소명도 다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항변이다. 채권단의 무리한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도 한다.

사태는 꼬일 대로 꼬였지만 원인은 간단하다. 거칠게 표현하면 우리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했다며 마냥 들뜰 수준이 아니란 얘기다. 채권단, 기업, 정부 모두가 잘못했다. 그중에서도 채권단 잘못이 가장 크다. 돈만 많이 챙기면 된다는 탐욕이 눈을 가린 탓이다. 물론 돈 많이 주겠다는 곳에 파는 걸 나무랄 순 없다. 그렇더라도 ‘이왕이면’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이왕이면’ 좋은 기업에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인수하겠다는 기업의 오너 자질과 경영능력, ‘승자의 저주’ 가능성을 철저하게 따져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때는 소홀히 해놓고 이제 와서 제대로 따지겠다니 현대그룹이 승복할 리 없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게 세상 인심이라지만, 그래도 채권단이 너무 심했다. 그러니 ‘막가파’ 소리를 듣는 것이다.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도 오십 보 백 보다. 무엇보다 현대건설을 인수할 자격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현대건설의 부실화와 공적자금 투입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회사 사정이 좋아져 매물로 나왔다고 해서 덜렁 인수하겠다는 건 아무래도 우습다. 금융감독 당국도 제대로 모니터링 못한 책임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민간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금액이 수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거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모니터링도 하고 가이드라인도 제시할 책임이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 중 하나는 지난 역사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경고다. 현대건설도 마찬가지다. 금호아시아나의 대우건설 인수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태였다. 기업은 무리하게 남의 돈을 끌어당기면 같이 망한다는 것을, 채권단은 인수자의 능력과 자격을 제대로 따지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덤터기를 쓴다는 걸, 감독 당국은 대규모 거래를 면밀히 모니터링하지 않으면 국민경제에 큰 부담이 된다는 교훈을 깡그리 잊었더랬다.

문제가 복잡하면 해법은 단순한 게 좋다. 해결의 실마리는 이미 제시돼 있다. 모레까지 현대그룹이 대출계약서를 채권단에 제출하면 된다. 채권단과 현대차그룹이 ‘막가파’식 논리를 들이대고 있는 건 맞지만 그러나 어쩌랴.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면 현대도 버틸 일이 아니다. 그래도 않겠다면? 연내 매각의 꿈은 사라지고 현대건설은 오랫동안 표류할 것이다. 최소한 법정 다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역사의 교훈을 잊은 징벌이다.

김영욱 중앙일보 경제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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