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은 서울시민들과 경기도민들의 사랑을 받는 녹지축이다. 둘레길이 생기고부터는 평일에도 산책 나온 시민들의 발길이 잦다. 비봉길은 평창마을길 구간에서 옛 성길 구간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구기터널 삼거리에서 시작된다. 비봉(碑峰)은 봉우리에 비석이 서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무학대사 비석이라는 설이 전해왔다. 1816년과 1817년,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가 이 봉우리에 올라 비문을 판독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장을 발로 찾아다니는 실증사학의 역사가 그만큼 짧기도 했지만 마모가 심한 한문글씨여서 판독이 어려웠다. 새삼 한자 문화유산의 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기시킨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51>서울 종로구 한국고전번역원
비봉길 초입, 버스정류장 근처 오래된 건물이 한국고전번역원이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비좁은 뜰을 몇 발자국 걸으면 바로 현관이다. 2007년 11월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를 계승해 설립된 교육부 산하기관으로 그간 조선왕조실록·고전국역총서·한국문집총간 등을 국역·출간했다. 우리가 접하는 우리 고전의 상당수가 민추의 수집·정리·번역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갖가지 고전열람은 물론, 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DB)에서 까다로운 고전용어의 출전과 뜻도 쉽게 알 수 있다. 2005년 350책으로 완간된 한국문집총간은 중국의 사고전서에 필적하는 민족문화총서다. 이 땅에서 살다 간 선조들의 생각과 사상이 담긴 문집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정신문화유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정보의 홍수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전통 고전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고전이 어둔 밤의 횃불이자 강을 건너는 뗏목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발 빠른 정보화 사회를 맞으면서 고전은 시부저기 뒷전으로 밀려났다. ‘누구나 그 이름과 유익함을 알지만 재미가 없어서 안 읽는 책이 고전’이라는 객담에 하소연 같은 게 들어있다.
독서법에 고칠현삼(古七現三)이라는 게 있다. 검증된 고전 7할, 신작 3할로 안배해서 책을 읽어야 균형 잡힌 지성이 된다고 한다. 고전 읽기는 안목을 키우고 품격을 높이는 데 더 없이 좋은 양식이다. 실용서나 말랑말랑한 이야기, 판타지에 치우치면 사상적인 뼈대가 생기지 않는다.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책 1위가
1894년 갑오경장은 전통적인 한문 문화권의 일대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 이전에 발간한 문헌을 고전으로 친다. 갑오경장 이후 한문 중심 어문생활이 국한문을 병용하는 어문생활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격동기는 국학(國學)의 불모지였다. 열패감을 심어준 불행한 역사는 우리 것에 대한 냉소주의를 낳았고 우리 고전은 외면당했다. 게다가 순한글 전용 세대는 원전(原典)을 이해하지 못해 필연적으로 전통문화의 단절을 불러왔다. 전통양식을 버리고 하루 바삐 서구화하는 것이 근대화라고 여겨온 세월이 한국 현대사다. 오늘날 우리
의 생활문화에서 동양문물과 서양문물을 구별하는 건 무의미하다. 정신문화 역시 혼재돼 있다. 그나마 우리말과 글로 하는 어문생활 덕분에 이만큼의 고유성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당대의 학·예술계의 원로들이 모였다. 박종화·박종홍·신석호·이병도·이해랑·최현배 등이 주축이 되어 1965년 11월 6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강당에서 민추 창립총회를 열었다. 창립회원은 각계를 대표하는 50인으로 구성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한 이들은 학·예술원 신축, 세종대왕기념관 건립, 국립도서관 이전, 국사편찬위원회 청사 마련 등 대정부 건의문을 제출했다. 초창기 민추가 학계와 예술계의 청사진을 그린 것이다. 고전국역편집위원회도 이때 발족했다.
민추 초대회장으로 소설가 박종화(1901~81)가 선출되었다.
사회단체로 출발한 민추는 70년에 재단법인으로 개편된다. 그러나 업무 환경은 열악했다. 국가보조
금을 받아서 번역사업과 국역자 양성사업, 고전 영인사업, 출판 등을 해오면서 더부살이와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86년에야 가까스로 지금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건물 외부나 내부는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고풍스럽지도 않다. 비좁은 터에 옹색하기까지 한 이곳에서 민족문화와 한국인의 정체성을 생각한다. 근대화 시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문화와 독서·저술 풍토를 누려왔다. 물론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대부들 중심의 인문적 토양이었다. 한문은 동아시아인들이 공유해온 문자였다. 하지만 한문은 이제 연구자나 특수한 부류의 문자가 돼버렸고 대중들은 번역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글을 쓸 때나 말할 때, 전거(典據)를 중국이나 서양 고전이 아닌 우리 고전에서 인용할 때 비로소 민족문화가 꽃피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인터넷으로 누구나 쉽게 열람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부터 다시 번역해야 합니다. 한자어도 많이 풀어 써야지요. 조상들의 생각이 담긴 문집들, 방대한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신승운(59) 교수는 지금도 번역원이 쓰고 있는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이라는 표어를 만든 민추 출신 학자다.
민추 42년 역사는 국학 대가들의 땀과 혼이 배어 있다. 역대 회장과 이사장들, 사무국장들은 우리 고전을 품에 안고서 소명을 다해 왔다. 이우성(85) 제4대 회장, 조순(82) 제6~7대 회장, 박석무(68) 초대원장은 고전번역원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다. 부설 번역교육원은 국역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초창기 70년대에는 이병도·성낙훈·신호열·조규철·임창순 등의 쟁쟁한 원로 학자들이 교수진으로 활동했다.
난해한 한문을 한글처럼 막힘 없이 술술 읽고 해석했다는 방은(放隱) 성낙훈(1911~77) 선생의 일화는 민추 사람들의 단골 회고담이다. 걸어 다니는 고전이요 해설집으로 통한 선생은 몸소 토를 달아가며 번역 교육을 하면서 “내가 지금 글 종자를 뿌린다”고 했다 한다. 한문을 아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걸 글 종자가 떨어져간다고 본 것이다. 애주가였던 선생은 폭음을 즐겼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의 도리를 알았기에 대학교수직보다 민추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더 힘썼다. 민추의 고전번역자 양성 프로그램은 정평이 나 있다. 민추 출신 글 종자들은 거듭 열매를 맺어 이 나라 한문고전 번역가의 8할을 차지한다고 한다. 동문도 1300명을 넘어섰다.
“고전 국역사업 못지않게 번역자 양성교육, 시민과의 소통도 중요합니다. 업무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은평구 신사동 건물을 임대해 쓰고 있는 교육원(원생 202명)은 본원과 같은 건물에 있어야 합니다. 전주분원(원생 45명)은 그대로 두고요. 그런데 본원 건물이 너무 협소해서 어림도 없어요. 장애인 시설조차 갖추지 못하는 걸요. 터라도 넉넉하다면 증축하겠는데 300평 남짓해서 곤란해요.”
지난달 취임한 이동환(71) 원장은 업무 생산성을 높이고 시민강좌와 고문서 해독 서비스 같은 부대사업을 위해서는 보다 넓은 청사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를 지낸 이 원장은 오랫동안 민추 일을 겸해왔다. 열악한 업무환경에서 일해 온 직원들은 좀 더 넓고 쾌적한 터에 신청사 신축을 소망한다. 45년 동안 애써 쌓아온 지적 자산을 시민들과 나누기 위해서는 접근성도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문화가 국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다. 우리가 그간 외면해왔던 전통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 콘텐트를 만들어야 할 때다. 우리는 으레 군사독재 시절에 반문화 정책이 시행된 걸로 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고전국역 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져, 연두 순시 때면 꼭 번역서를 챙겼다고 한다. 국역
개인적으로 고전번역원 건물은 그간 여러 차례 찾아왔다. 민추에서 발간한 책들도 두루 구입했고 ‘고전의 향기’ 메일링 서비스도 받아본다. 그래서 다소 누추할지언정 고향집처럼 정겹다. 글 읽는 학자들, 우리 시대 군자들의 일터를 누추하다고 하면 실례일까. 바른 도리가 행해지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