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아야코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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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세의 나이로 별세한 '빙점'의 작가.

64년 아사히 신문은 '잡화점의 주부, 깊은 밤 계속 글쓰기 1년'이라는 제목으로 창간 85주년 기념 1천만엔 현상공모에 미우라 아야코가 당선됐음을 알렸다. 42세의 나이에 등단한 그녀의 첫 소설 '빙점'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빙점은 일본문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독교적 시각으로 인간의 원죄와 구원 문제를 다룬 작품. 미우라 아야코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억울하다고 믿지만 그와 같은 오인이 인간이 비참해지는 원인이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이런 빙점(氷點)
이 존재한다" 밝힌 바 있다. 이후에 나온 작품에서도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한 주제는 인간의 원죄문제.

60년대 후반 '설국'과 더불어 일본작가 열풍이 불게 한 그녀 작품의 미덕은 작가가 보여준 솔직함과 담담함. 이는 그녀 개인이 갖는 비극에서 나온 듯 하다.

스물 네살의 나이에 갑작스런 고열로 병상에 누운 그녀는 이후 13년간 매일 천장만을 쳐다보며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이후 신과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병상에서의 습작이 그녀 작품의 밑거름이 되었다.

결핵, 직장암, 파킨슨병, 포진 등의 난치병과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절망에 빠질 법도 했던 70 평생이지만 죽기 전까지도 남편 미우라 미쓰요의 도움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면서 그녀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작년에는 일본 전역 1만 5천명의 독자들의 참여로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 주요 작품
1. 길은 여기에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7,000원1994년 9월 출간
2. 길은 있었네 /문학사상사 5,000원1993년 6월 출간
3. 나는 비록 약하나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5,000원1993년 12월 출간
4. 내게 강같은 평화 /홍성중떡갈나무 6,000원1998년 12월 출간
5. 빙점 /홍신문화사 8,000원1995년 12월 출간
6. 살며 생각하며 /범우사2,000원1996년 10월 출간
7.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끝이 보인다 /한국장로교출판사 5,000원1998년 1월 출간
8. 연인의 그림자 /이장구아라출판사 5,000원1994년 1월 출간
9. 이 질그릇에도 /이재신대한기독교서회 5,000원1994년 9월 출간
10. 처마밑의 작은 새 /원종익웅촌 3,000원1989년 9월 출간
11. 총구 /한국장로교출판사 7,000원1997년 7월 출간

* 미우라 아야코 수필 중에서

사랑의 조건

나의 남편 미우라가 택한 신부감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나다. 나는 왜 그가 나같은 여자를 택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기만 하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데는 저마다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 선택 조건이 있듯이 남자에게도 저마다 미래의 아내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둥그스름한 얼굴을 가진 명랑한 여성’이라든가 ‘음식솜씨가 뛰어나고 자상한 여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스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을 지니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는 조건은 상대가 여자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이어서 새삼스럽게 내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여자가 남자인 자신보다 나이가 적어야 한다는 사실도 당연한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당신의 형이나 동생 또는 아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폐결핵과 척추 카리에스로 8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각혈도 합니다. 나이가 33세이니 나보다는 두 살이 더 많고 그다지 예쁜 편도 아닙니다. 그녀의 애인은 죽었고 그녀의 머리맡에는 항상 그 애인의 사진과 유골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녀의 병세가 언제 호전될 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에 그녀가 낫지 않는다면 난 절대로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당신은 “세상에 그런 법은 있을 수 없다!”며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나 자신도 물론 그런 경우에는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나의 남편 미우라 미츠요이다. 그는 공무원이었고 꽤 핸섬했다. 그는 여러 여성으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듣기도 했고, 혼담도 무척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마다하고 오직 나만을 기다려 주었다.

더구나 내 주위에는 여러 명의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가 나를 찾아왔을 당시에도 몇몇 남자친구들이 나의 병실을 번갈아가며 찾아와 주곤 했었다. 게다가 나는 예쁜 얼굴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그다지 순수한 편도 아니었다.

대체 그가 기다릴 만한 가치가 나에게 무엇이 있었을까를 자꾸 곱씹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 주일에 한 번씩 문병을 왔고 계속 격려해 주었다. 그 결과 그를 만난 지 5년 만에 나는 겨우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내 건강이 7년 걸려서 회복되든지, 8년 걸려서 회복되든지 간에 틀림없이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가 35세, 내가 37세 되던 해에 마침내 우리는 교회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20명 가량의 사람들이 약간씩의 회비를 내어서 홍차와 케이크를 마련하여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다. 간소하기 그지없는 파티였지만 정성이 가득찬 감동적인 것이었다. 결혼 전날까지 신열이 있던 나는 신혼여행도 포기한 채 남의 집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단칸방에서 그와의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나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긴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한 가지도 갖지 못한 나를 기다려 주고 끝내 아내로 삼아 준 미츠요의 사랑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것이리라.

참다운 사랑이란 것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볼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인간적인 결점과 허약한 신체, 남의 입에 오르내리던 연애 사건을 모두 포용한 미츠요의 사랑이야말로 참다운 사랑이 아닐까?

결혼한다는 것은 상대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용서할 각오가 있어야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와 결혼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손창원 인턴기자
<pendo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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