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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5) 중앙청 앞 군중 환영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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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2년 12월 3일 서울 중앙청 앞 광장(현 광화문광장)에 아이젠하워의 방한을 환영하는 군중이 모여들고 있다. 현수막에 보이는 경전(京電)은 경성전기의 약자인데, 이 회사는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로 시작해 1915년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61년 조선전업·남선전기와 함께 한국전력주식회사(지금의 한국전력공사)로 통합됐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수행하고 미군 고위 장성들이 다음 행사를 위해 찾은 곳은 경기도 광릉에 머물던 국군 수도사단이었다. 송요찬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은 6·25전쟁 개전 이래 줄곧 용맹을 떨치던 부대였다.

 내가 이끌었던 지리산 빨치산 토벌 부대인 ‘백 야전전투사령부’, 강릉의 1군단 예하 부대로서 다양한 작전을 펼쳐 대단한 전과(戰果)를 올렸던 사단이었다. 수도사단 부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미 고위 장성들 앞에서 다양한 시범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어두운 곳에서 총기를 분해했다 다시 조립하는 기술 등을 선보였다. 날씨는 매우 추웠다. 수도사단 방문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함께했다. 귀빈들은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연병장에서 펼쳐지는 수도사단의 시범을 열심히 관람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일은 국가와 국가가 주고받는 외교적인 의전 사안이어서 그런 착오가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사단 방문을 마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일행의 다음 일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에 도착한 2일 저녁 그의 방문 사실을 알고서는 별도의 준비를 지시한 상태였다. 3일 오전 10시쯤 지금의 광화문광장에서 대대적인 군중 환영대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그 차가운 날씨에 이승만 대통령은 군중 수만 명을 광장에 모이도록 했다. 군중 또한 신임 미 대통령 당선자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이젠하워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청 앞에 있던, 지금의 광화문광장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지금 사정으로 보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그런 이승만 대통령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주둔 중인 미 9군단과 미 3사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그곳에서 미군 장병을 격려하고 그들과 함께 오찬을 했다. 미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일선에 나가 있는 미군 장병을 격려하고 위문하는 것이야 반드시 필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섭력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발걸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떤 경로로 교섭이 그렇게 진행됐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당시의 외교부와 주한 미국대사관, 또는 미 8군 사령부가 나서서 교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중대한 착오가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광릉의 수도사단에서 광화문광장으로 온 이승만 대통령의 처지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신임 미국 대통령 당선자에게 한국의 뜨거운 환영 열기를 보여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최고 영웅을 맞이하자는 취지의 군중대회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뿐이 아니었다. 중앙청 앞에 있던 광화문광장에는 제법 기다란 차일(遮日)이 만들어져 있었고, 연단도 마련한 상태였다. 차일 속에는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정부 각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군중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를 보기 위해 계속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당선자 일행은 광화문광장으로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속으로 ‘이것 참 큰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으로 그냥 차일 안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측으로부터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곧 행사장으로 올 것이라는 전갈이 전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는 그렇게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셀 수 없었지만, 광장으로 모여드는 인파는 계속 불어났다. 어림잡아 10만 군중은 되어 보였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윽고 이승만 대통령이 연단 위로 올라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요즘에도 가끔 들어보는 이승만 대통령의 당시 연설에는 ‘북진(北進) 통일’이 자주 등장한다. 나이 80을 바라보던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희망은 역시 북진통일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느닷없이 침략을 당했지만, 종국에는 그들을 이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자는 얘기였다. 이 대통령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 북진통일을 강조하고 다녔다. 특히 미군이 듣는 앞에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민족의 영토를 모두 통일하는 꿈을 역설했다. 비록 단독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미군과 유엔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격해 통일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대통령은 자주 역설했다.

 그날의 연설도 예의 그 ‘북진통일론’이 대세였다. 발언을 시작한 지 꽤 지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느닷없이 ‘전쟁 영웅론’을 꺼내 들었다. “여러분, 미국에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도 전쟁의 영웅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이 내 이름을 호명하자 나도 모르게 연단을 바라보면서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라며 넋을 놓을 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뒤를 바라보면서 차일 속의 나를 찾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어 나를 발견한 뒤 손짓을 했다. ‘이리 나오라’는 제스처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민망함, 부끄러움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다. 나는 차일 밖으로 나와 연단에 올라섰다. 광장 앞에 모여 있던 군중이 환호성을 올렸다. 커다란 함성소리가 광장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연단에 서서 힘찬 거수경례를 했다. 광장이 다시 커다란 박수와 함성소리에 빠져들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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