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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소독약·주사약 섞은 가짜 양주 … 한국전쟁 때 인기 치솟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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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46년 4월 18일, 서울에 처음으로 미군 전용 술집이 생겼다. 이름은 ‘성조(Stars and Stripes)’. 한국인 남성은 출입할 수 없었으나 이런 술집은 가짜 양주가 돌아다닐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 시절에는 ‘미군 술집에서 빼온 것’이라는 말에 속아 가짜 양주를 마시고 죽거나 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진 출처=『격동 한반도 새 지평』]

1950년 7월 1일, 미국 텍사스의 브루크 육군병원에서 갓 인턴을 마치고 콜로라도의 집에 있던 하비 펠프스(Harvey W. Phelps)에게 즉시 텍사스의 제6 탱크대대로 가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밤새 달려 노스캐롤라이나의 처가에 데려다 주고는 애슈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댈러스로 날아갔다. 그러나 부대는 이미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한 뒤였다. 다시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에 올랐다. 뒤늦게 배치 신고를 마친 그가 쉬지도 않고 바로 달려간 곳은 의무보급대였다. 배정된 의약품과 의료기구 외에 다른 것이 더 ‘남아 있나’ 살폈다. 다행히 많이 남아 있었고 그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찾은 것은 95% 에틸알코올과 주사용 포도당액이었다. 부대 군의관 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이 흔한 의약품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던 다른 군의관들은 부산에 상륙한 뒤에야 펠프스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펠프스는 이 덕에 장비와 물품을 남 먼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2차대전 중 미군 군의관들은 에틸알코올과 포도당액을 반씩 섞은 뒤 분쇄한 비타민 정제 2~3알을 넣어 술 대용품을 만들었다. 술은 정규 보급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대 안에서 이 대용품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포도당주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리로 밀려났고 제조법도 잊혀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에는 가짜 양주가 범람했다. 인체에 치명적인 메틸알코올로 만든 가짜 양주 때문에 연간 수십 명씩 목숨을 잃었다. 1949년 9월 보건부가 식료위생법을 기초할 때 일차적 관심사가 된 것도 가짜 양주였다. 원조물자로 들어온 에틸알코올을 배정받은 제약회사들이 합법적으로 생산한 ‘위스키’니 ‘브란듸’니 하는 상품은 아예 가짜 양주로 치지도 않았다. 한국전쟁 중 군부대의 ‘포도당 양주’는 그 전의 ‘가짜 양주’보다 훨씬 질이 좋았다.

 그 뒤 반세기 만에 가짜 양주는 속아서는 먹어도 알고는 못 먹는 술이 됐다. 이제 한국은 세계 제1의 프리미엄 위스키 소비 시장이다. 몇 해 전 세계 유수의 주류회사 CEO가 고마운 마음으로 한국에 왔다가 잔뜩 화가 나서 돌아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사의 자존심인 30년산 위스키를 ‘싸구려 맥주’에 ‘말아’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분통이 터졌다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송년회 자리에는 ‘폭탄주’가 돌 테고, 시국을 빙자하여 ‘방사포탄주’니 ‘자주포탄주’니 하는 것들이 새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인 만큼 옛 생각을 해서라도 조금 자제하는 것이 어떨지.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