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리더십은 울림에서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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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착잡한 한 주였습니다. “결단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다짐을 들어도, 태안 앞바다까지 와서 무력시위하는 미 항공모함의 위용을 봐도 먹먹한 가슴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도발에 속 시원한 보복을 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니냐는 두려움 탓도 아니었습니다. 비상사태에 임하는 우리네 위정자들의 행보가 터럭만큼도 미덥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대북 강경책이 도발을 불렀다”거나 “6자회담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들은 귀에 담을 가치도 없습니다. ‘폭탄주’나 ‘보온병’ 해프닝도 어처구니없긴 해도 한번 웃고 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 땅과 이 백성의 명운을 손에 쥐고 있는 리더의 행보는 다릅니다. 일거수일투족 하나도 소홀히 넘길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대한민국 땅이 공격받던 날 갈팡질팡했던 건, 리더의 잘못이었든 ‘청와대 개자식들’ 책임이었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대국민 담화를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만 그랬나요? 울림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늘 당하고 터지고 나서 앞으론 잘하겠다는 그 소리였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겠다는 그 얘기였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들었던 말 아니던가요. 구체적인 응징 약속을 바란 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울림이 있어야 했다는 겁니다. 리더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면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비전을 국민들 마음에 심어줬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쿨리는 “모든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아이디어를 전달함으로써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의 리더십을 연구한 예일대 정치학과 스티븐 스코로넥 교수는 그 ‘아이디어’를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짜임새 있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결국은 울림이란 말입니다.

 그 울림은 한 가지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우고, 바다에서 싸우고, 들판에서 싸우고, 언덕에서도 싸울 것”이라던 처칠처럼 단호한 의지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던 케네디처럼 도전적인 주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던 루스벨트처럼 희망 섞인 위안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울림의 리더십은 나이 먹는다고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젊은 리더가 가능한 것도 그래서지요. 세번 컬리스 스즈키라는 캐나다 환경운동가가 있습니다. 아홉 살 때 또래들과 함께 ECO(Environmental Children’s Organization)라는 환경단체를 만들고 열두 살 때인 1992년에는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리우에서 열린 유엔 환경회의에 참석해 연설합니다. 내용이야 아이들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제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 저는 온갖 야생동물로 가득한 정글을 보는 게 꿈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 아이가 볼 수 있을 때까지 남아있을지 의문입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해결책이 없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구멍 난 오존층을 고칠 수 있는 방법조차 모르잖아요. 고칠 방법을 모른다면 제발 더 이상 망가뜨리지나 마세요!”

 때로는 울림이 잘못 울리는 수도 있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부끄러움 없는 행동이었는데 의심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거지요. 그럴 때 어리석은 리더는 남 탓을 하고, 현명한 리더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옛날 중국의 안지추라는 사람이 자손 교육을 위해 쓴 『안씨가훈(安氏家訓)』에서 그 얘기를 합니다.

 “사람의 발이 밟는 면적은 불과 몇 촌(寸)에 불과하다. 그런데 몇 척(尺)이나 되는 길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아름드리 통나무 다리를 걷다가 미끄러져 강물에 빠지기도 한다. 왜 그런가. 여지(餘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해를 사고 의심을 받는 것도 그렇다. 그 사람의 언행이 명성을 좇느라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심이 끼어들면 울림의 공명판이 작아질 수밖에 없지요. 버려야 얻는다는 게 여기서도 진리입니다. 자신을 버리면 울림이 커지고, 울림이 클수록 커다란 리더십이 생겨납니다. 거기에 보너스로 딸려오는 게 명성이요, 명예입니다. 이 순서가 이해되지 않으면 리더가 될 생각을 버리십시오. 탄탄대로를 걸으면서도 발목을 접질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훈범 중앙일보 j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