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5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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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웃의 야채 가게 아저씨와 생선전 아저씨가 뛰어 올라왔다. 어머니는 앰뷸런스를 불렀다. 그들은 나를 일으켰지만 '등이 이미 바닥에 붙어서' 너무도 무거웠다고 한다. 장정이 떠메고 시장통을 벗어나는 큰 길까지 가는데 내 두 다리에 이미 경직이 시작되어 뻣뻣하게 질질 끌려갔다고 한다.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 영등포 시립병원 응급실로 갔다. 어머니는 집 볼 사람이 없어 학교에 간 아우도 다시 부르고 시집 간 큰 누나 내외도 부르고 정신이 없었다.

의사는 내 눈꺼풀을 까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응급조치를 취하고 산소통을 갖다 놓고 입과 코에 산소를 흡입시켰는데, 큰누나가 임상 기록을 넘겨다 보니 다른 것은 모두 '미정'인데 심장만 '파서블'이라고 적었더라고 한다. 나는 나흘 동안 의식 없는 채로 누워 있었는데 사흘째 가서야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한번 몸부림을 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온 식구가 달려들어 누르고 손발을 잡고 있어야 했다.

내가 깨어난 것은 닷새째의 오후였다. 안정권에 들었다고 생각한 의사가 퇴원 허락을 하여 어머니는 나를 일단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큰누나네 셋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큰형님과 누나가 함께 교직을 갖고 있어서 그들은 출근 중이었고 내가 고요하게 잠만 자는 것을 보고 어머니도 장을 보러 잠깐 외출 중인 때였다. 나는 벽 쪽에 누워 있었는데 눈을 뜨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엇인가 부연 빛이 오른쪽에 보였다. 본능적으로 그곳이 툭 터진 곳이고 내가 그쪽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일어날 것 같았다. 나는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벽에 두 손을 댄 채로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부연 빛 앞에 섰는데 처음에는 그냥 짙은 안개 속에 섰을 때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크고 넓은 유리창 앞이었다. 부연 안개 속에서 차츰 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옇게 보이던 빛이 점점 연노랑으로 변하더니 한참 뒤에는 더욱 짙어져서 진노랑이 되었다. 집도 땅도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들도 모두 진노랑 속에 파묻힌 채로 어렴풋이 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색깔이 변해가는 모습을 내다보았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 전에 학교에서 학질 예방약이라고 나누어 주던 키니네를 먹은 뒤와 같았는데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나는 색깔이 차츰 나누어지며 각각의 색으로 돌아갈 즈음에야 간밤에 눈이 왔고 하늘은 쾌청하게 맑고 푸르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 그때 얘기를 하다가 자기도 같은 색을 보았다며 고흐의 해바라기나 보리밭 얘기를 해서 다시는 색깔에 대하여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던 생각이 난다. 하여튼 그 진노랑을 어디서 다시 보게 될까. 아마 현기증과 편집적인 응시의 산물이겠지.

되살아나서 나는 남도 방랑이나 죽었다가 돌아온 얘기는 아예 감추고 아직도 맹렬히 독서 중인 친구들을 가끔 만나 흰소리나 하며 지냈다. 참, 그런데 내가 그 무렵에 무슨 연애 비슷한 사건이라도 없었나.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라서 자기 자신의 문제에 너무 잡혀 있어서 깊숙이 빠져 보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잠깐씩 생각해 보곤 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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