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의 진상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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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일 아침까지 더 생각해 봅시다.”
현대 주가조작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던 지난 9월8일 늦은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8층 총장실. 임휘윤(林彙潤)
서울지검장과 이 사건의 수사팀장인 이훈규(李勳圭)
서울지검 특수1부장이 박순용(朴舜用)
검찰총장에게 그간의 수사경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임지검장과 이부장은 보고 말미에 “범법사실이 분명하고 이미 종범(從犯·현대증권 朴喆在 상무)
을 구속한 마당에 주범(李회장)
도 구속처리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다”고 건의했다. 주가조작을 지시한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을 구속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박총장은 즉석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임지검장과 이부장을 돌려보낸 박총장은 곧바로 신승남(愼承男)
대검차장 등 대검 간부 8명에게 연락해 회의를 소집, 이회장 구속 여부를 논의했다.

‘경제위기 속에서 증시를 1천포인트까지 끌어올린 이회장의 공로와 그가 구속될 경우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해 불구속 처리해야 한다’는 경제논리가 제기됐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가 중요해도 범법은 용납할 수 없으며, 이미 종범이 구속된 마당에 주범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법의 논리를 누르지는 못했다

검찰에 전해진 청와대의 ‘신중론’

참석자 대다수가 ‘구속’쪽으로 의견을 냈다. 이회장 구속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검토중’이라는 별명답게 박총장은 신중했다. 이튿날 오전에 결정짓기로 하고 회의는 끝났다.

‘구속’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대검 간부회의가 끝나고 한시간쯤 지났을까. 저녁 무렵 검찰 고위간부 P씨의 집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P씨가 수화기를 들었다. BH (Blue House· 청와대)
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아무래도 경제문제가 아직까지는 중요하고 또 지금 대북사업 관계도 걸려 있고 하니 이회장 사법처리 문제를 좀더 신중하게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회장을 구속할 경우 우려되는 경제적 파장, 그리고 현대그룹이 진행중인 대북사업에 끼칠 악영향 등을 고려해 사법처리에 신중을 기해 달라는 ‘원칙론·신중론’이었다. 검찰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이같은 청와대측의 전화는 앞서 이날 다른 검찰 간부에게도 한차례 더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익치 회장의 사법처리를 앞두고 청와대에서 두차례나 검찰에 ‘신중론’이 전달된 것이다.

물론 통화 내용 자체만으로 보면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전화를 받는 쪽의 입장에서 그 뉘앙스는 분명히 구속보다 불구속 쪽이었다.

현대 주가조작사건과 관련, 청와대에서는 이미 앞서 9월3일 “현대측 해명(현대 계열사들이 사들인 현대전자 주가가 올랐다고 해도 그것을 팔지 않고 그냥 보유하고 있어서 이익을 거두지 않았고, 또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일반 투자자도 없으므로 주가조작이 아니라는)
에 일리가 있다”는 반응이 나왔던 터였다. 그런 터에 이회장의 사법처리를 전후해 걸려온 청와대의 전화는 검찰을 뒤흔들었다.

그같은 동요는 대검 간부회의가 열렸던 8일 저녁 길 건너편 서울지검에서 역력히 감지됐다. 이날 내내 “법대로 잘 될 것”으로 낙관하던 서울지검 관계자들과 수사팀의 분위기가 저녁 무렵부터 일변한 것이다.

밤 9시쯤 임휘윤 서울지검장과, 그동안 언론에 사건의 수사브리핑을 맡아온 임양운(林梁云)
서울지검 3차장, 그리고 이훈규 특수1부장이 밖으로 나가려다 청사 1층에서 기자들과 마주쳤다. 낌새가 몇시간 전과 딴판이었다. 잔뜩 굳은 표정들이었다. 기자들이 임차장과 이부장을 떼밀어 기자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임차장과 이부장은 “내일까지 두고봐야겠다”고만 했다. “이회장 사법처리가 어렵다는 것인가”라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이부장이 “실체적 진실은 변함이 없어요”라고 어금니를 물며 탁 내뱉고는 일어섰다. 두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던 임지검장과 함께 청사를 나갔다.

기자는 이 부분에 대해 나중에 청와대의 대(

對)검찰 창구인 박주선 청와대법무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박비서관은 “나는 현대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전화를 건 일이 없다”고 말했다.

언론에서는 ‘진통’이라고 표현했지만 검찰청사 주변의 분위기는 ‘불구속 유력’이라는 쪽의 얘기가 더 무성했다. 현대측에서는 이런 검찰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이회장의 소환 이후 이틀 동안 비어 있던 이회장 방을 다시 청소하는 등 ‘불구속’에 대비했다. 현대측에서는 이회장이 구속되던 순간까지도 ‘설마 구속까지야 안 가겠지’라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튿날인 9일 오전 중에도 검찰 수뇌부에서는 좀처럼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수사팀은 ‘불구속’소문(?)
에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대검과 서울지검의 간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윽고 오전 11시30분 임양운 차장이 기자실로 들어섰다. 그는 “이회장 구속 여부를 둘러싸고 심사숙고한 끝에 경제정의 실현, 원칙과 기본 충실, 법적 형평성을 고려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법의 논리가 경제논리를 이긴 것이었다.

이후 이회장에 대한 사법처리는 수순대로 진행됐다. 오후 4시30분 이익치 회장은 서울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에 들어갔다. 박형남(朴炯南)
판사가 주재한 1시간30분간의 실질심사 과정에서 이회장은 “한국경제를 살릴 일념으로 열심히 일해왔다”면서 “주가 관리를 잘 하라고 밑에 지시했을 뿐, 주가조작을 지시한 적은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구속이 결정되고 법원을 나오던 이회장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이윽고 밤 9시쯤 그를 태운 승용차가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98년 8월 처음 불거져나왔던 현대 주가조작사건이 1년여만에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재벌때리기’인가?

신문기사부터 다시 보자.
‘서울지검 특수1부(이훈규 부장검사)
는 현대증권 이익치(55)
회장이 현대전자 주가조작을 주도한 혐의(증권거래법 위반)
를 포착하고 조만간 소환 조사한 뒤 사법처리키로 했다.

이회장은 현대중공업·현대상선·현대전자 등 3개 계열사에서 2천2백억원을 끌어들여 차명계좌를 이용,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현대전자 주가를 주당(株當)
1만4천8백원에서 3만2천원선으로 끌어올려 현대그룹이 수천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기도록 한 혐의다.

검찰은 지난 7월초 현대전자 주식을 1억원 이상 거래한 증권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 확보한 계좌 2백25개와 현대그룹 임원 등 1백여명에 대한 조사를 통해 혐의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검찰은 현대중공업 김형벽 회장, 현대상선 박세용 회장을 불러 주가조작 공모 여부를 조사하는 한편 현대전자 대주주인 정몽헌·몽근·몽준씨 등의 관련 여부도 조사하기로 했다. 앞서 검찰은 8월말 이익치 회장을 비롯해 현대 관계자 9명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검찰은 8월23일 주가조작 실무를 담당했던 현대증권 기업금융본부장 박철재(48)
상무를 증권거래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9월1일 불쑥 터져나온 이같은 내용의 검찰 발표는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물론‘현대전자 주가조작’이란 얘기가 나온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앞서 1년 전부터 툭 나왔다가 들어가고 다시 튀어나오고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사람들에게 친숙(?)
해진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검찰의 수사상황 공개는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날 오후 2시 무렵부터 증시는 불안정하게 출렁거렸다.
종합주가지수가 단숨에 30포인트나 떨어졌다. 현대전자 뿐만 아니라 ‘현대’라는 이름이 붙은 주식을 가진 투자자들이 앞다퉈 ‘팔자’주문을 냈다. 이같은 불안정세는 이튿날인 2일 오전장까지 이어졌다. ‘1년 전부터 다 알려진 소식’에 증시가 이처럼(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흔들린 것은 검찰의 수사발표 내용에 ‘이익치’라는 이름과 함께 현대그룹의 내로라하는 이름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익치 회장이 누구인가.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바이 코리아(BUY KOREA)
펀드’선풍을 일으키면서 실물경제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증시를 주가지수 1천포인트대까지 회복시킨 일등 공로자다. 또 현대가 추진중인 대북사업에서도 주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무엇보다 특유의 낙관론을 펼치는 ‘희망의 전도사’로 대중의 신망과 유명세를 얻어왔다. 그런 그가 엄청난 규모의 주가조작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더욱이 ‘잠적했다’는 소식은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이번 주가조작 사건의 규모가 사상 최대인 2천2백억원대에 이른다는 점, 또 98년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 장기간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검찰이 사상 처음 재벌기업의 조직적(?)
범죄에 메스를 댔다는 점 등이 어우러지면서 국민적 관심과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 커졌다.

사건 자체는 검찰이 수사상황을 처음 공개한 9월1일 이후 9일만에 이익치 회장의 구속으로 속전속결 일단락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회를 흔든 대형사건들이 예외없이 그러했듯 이번 사건도 여러 측면에서 굵직굵직한 의문점들을 부각시켰다. ‘Ⅹ누고 미처 밑을 다 닦지 못했다’는 듯, 사람들의 입에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오르내리는 의문점들을 모아보자.

가장 궁금한 점은 ‘왜, 어떤 계기로 이 사건이 불거지게 됐는가’일 것이다. 현대전자의 주가조작 징후가 처음 언론에 공개된 이후 1년이나 지난 시점에, 왜 불쑥 사건이 이처럼 크게 불거지게 됐는가. 정권이나 정부의 ‘재벌 다스리기’같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으레 그렇듯 이 사건도 검찰 수사상황이 공개된 직후 갖가지 설(說)
들이 재빨리 떠돌았다. 그것은 정권이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현대를 ‘시범케이스’로 ‘재벌 다스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잠깐 보고 넘어가자.

가장 유력하게 나도는 이야기는 정씨 일가에 대한 정권의 견제설이다. 재계와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건이 그동안 현대의 승승장구와 그에 힘입은 정씨 일가의 ‘득세’를 한풀 꺾기 위한 ‘정략’(政略)
이라고 보고 있다. 검찰 수사가 정씨 일가에까지 상처를 입히는 쪽으로는 확대되지 않았지만, 결국 정씨 일가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사건의 성격상 그렇다.

정씨 일가 중에서도 정몽준(현대중공업 고문)
의원을 겨냥하고 있다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도 붙어 있다. 월드컵을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 기업인 냄새가 거의 없고 정치적으로도 점차 입지를 넓혀가는 정의원을 견제하려는 것이라는 얘기다. 두가지 이설(異說)
이 따라 다닌다.

하나는 마땅한 차기 대권주자 후보를 찾지 못한 여권이 차기 대권후보 자리를 보장하며 정의원을 영입하려 했으나 정의원이 이를 거절, 오히려 그를 견제하기 위해 여권이 현대그룹을 건드렸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아예 정의원이 차기 대권후보로 나서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못질’을 해 상처를 입히려 한 것이란 추측이다.

둘째, 이익치 회장 개인에 대해 정권이 ‘괘씸죄’를 적용했다는 설이다. 소문인즉 이렇다. ‘국민회의에서 차기 총선, 혹은 신당 창당을 앞두고 이익치 회장을 영입하고 현대와 손잡으려 했으나 왕회장의 만류로 이회장이 거절했다’는 것. 이에 따라 정권이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렸다’는 얘기다.

셋째, 현대그룹, 나아가 재벌에 대한 정권의 ‘때리기’ 또는 ‘다스리기’라는 시각이다. 국민의 정부는 재벌그룹들의 구조조정을 강도높게 추진해 왔다. 현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는 지난해 ‘5대 부문으로 구조조정을 진행시켜 나갈 것’이라는 ‘종이 한장’만 달랑 발표해 놓고 실제로는 실천한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래도 말을 안 들을래’하는 차원에서 현대그룹을 혼내준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적어도 이번 사건의 전말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 의도나 또 다른 이면이 존재하는 것으로는 감지되지 않는다. 처음 시작할 때의 의도와 나중의 효과는 엄연히 다르다. 정치적 효과는 무성하게 추측할 수 있지만 뚜렷한 정치적 의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재벌때리기 차원에서 이번 사건이 촉발됐다면 차라리 수사하기가 한결 편했을 것”이라는 검찰 관계자의 얘기도 이번 사건의 발생 원인이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뉘앙스다. 도대체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사건이 시작됐으며 또 어떻게 그것이 진행된 것인지 금감원과 검찰의 조사과정을 중심으로 세밀하게 복기(復碁)
해 보자. 그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앞서 제기한 의문점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2천2백억원대의 돈이 동원된 일련의 과정이 과연 이익치 회장의 ‘1인극’이었는가도 궁금하다. 즉, 현대그룹의 ‘오너’인 정(鄭)
씨 일가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어떻게 ‘현대증권, 그리고 이익치’를 발굴(?)
하고 수사해 나갔을까. 또 수사 과정에 현대의 로비에 따른 외압은 없었는지도 궁금한 화제다. 나아가 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
조사 과정에서 왜 현대증권과 이익치란 단어가 쏙 빠졌을까 등도 의문이다.

金監院 조사 왜 늦어졌나

98년 8월 중순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의 ‘시장종합감리(監理)
시스템’이 현대전자의 주식거래 동향에 이상 징후가 있다는 경보(警報)
를 발했다. 종합감리시스템은 주식 거래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고 불공정 거래 행위를 적발하는 전산시스템이다. ‘경보시스템’과 ‘심리(審理)
지원시스템’으로 이원화돼 있다.

‘경보시스템’은 특정 주식의 거래량이나 주가에 이상 징후가 있으면 컴퓨터가 이를 적발해내고 곧바로 경보음을 내는 장치다. 하루 평균 적발 건수는 2백여건. 그 모든 이상징후를 증권거래소가 정색을 하고 조사할 수도 없고, 조사하지도 않는다. ‘심리지원시스템’이 한차례 걸러 준다.

주가조작 전력(前歷)
이 있는 사람, 증권사 직원, 상장법인의 주주 명단 등의 데이터베이스 체제에 연결된 심리지원시스템은 이상징후가 발견된 종목의 움직임을 자동추적해 어느 정도 혐의가 있는지 가려낸다. 여기서 혐의가 짙은 것으로 판명된 종목과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증권거래소가 자체 인력을 투입해 1차 조사를 벌이게 된다.
지난해 경보가 울린 현대전자의 주식 매매동향은 이런 과정을 그대로 거쳐 8월 하순까지 증권거래소의 1차 조사를 받았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이 조직적으로 현대전자 주가를 조작(=시세조정)
한 혐의가 짙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당시 현대상선은 조사 대상이 아니었고 문제가 된 기간도 98년 5월부터 7월까지 두달간이었다. 1차 조사를 마친 증권거래소 (심리총괄부)
는 8월25일 이를 금융감독위원회로 넘겨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조사는 즉각 이뤄지지 않았다. 금감위가 현대전자 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은 증권거래소의 의뢰가 있고도 5개월여가 지난 올 2월1일이었다. 왜 그렇게 늦었을까. 금감위측의 설명.

“의뢰가 온다고 해서 즉각 조사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접수되는 순서대로 조사하는 게 관행이다. 앞에 줄 서 있는 사건이 많으면 그만큼 조사 착수가 늦어진다. 조사착수 시기를 임의로 결정하거나 순서를 바꾸는 일은 아주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없다. 지난해까지 조사 인력이 매우 부족했고 접수된 사건도 많았다. 그래서 지난해 처리되지 못하고 올해까지 넘어온 게 65건이나 됐다. 거기에다 지난 연말부터 올초까지 진행된 금감위 기구 개편도 조사 착수를 늦추게 한 요인이 됐다.”

증권거래소 등에서 넘어오는 조사의뢰 사안들은 금감위 산하 금융감독원의 조사국으로 넘어간다. 조사국은 1-2-3국으로 구성돼 있다. 조사1국은 코스닥(KOSDAQ)
과 선물(先物)
거래 및 금감원 자체 기획조사 사건을 담당한다. 조사2국은 증권거래소에서 의뢰되는 사건을, 조사3국은 보험 부문을 다룬다. 현대 건은 자연스럽게 조사2국이 담당하게 됐다. 조사2국은 제1팀, 제2팀 하는 식으로 제12팀까지 구성돼 있었다. 한 팀의 인원은 팀장과 팀원이 각 1명꼴로 평균 2명.

조사국의 조사업무는 각 국장의 지휘 아래 독자적으로 이뤄진다. 금감위 개편과 함께 1월1일자로 조사2국장에 부임한 박태희(50)
국장이 지휘를 맡았다. 연초 박국장은 앞서 처리되지 못하고 밀려 넘어온 60여건을 팀별로 3~4건씩 분배(分配)
했다.

현대 사건은 제10팀에 배정됐다. 조사업무는 1월10일께부터 본격화됐다. 제10팀은 다른 사건 하나를 먼저 처리하는 데 20일 가량을 보냈다. 이어 착수한 두번째 작업이 바로 현대 주가조작 건이었고, 그 날짜가 2월1일이었다.

그때부터 3월말까지 두달여에 걸쳐 매매분석 작업과 관계자 청문(聽聞)
조사가 이어졌다. 매매분석 작업은 현대전자 주식이 거래된 계좌 하나하나를 따져 주식가격이 과연 어떻게 성립됐는가 하는 점을 추적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증권거래소에서 넘어온 대로 98년 5월부터 7월까지 두달간의 매매분석을 했지만, 주가조작 혐의가 드러나면서 조사대상 기간이 11월까지로 두달 더 늘어났다. 거래건수는 9만여건. 박국장에 따르면 제10팀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휴일도 반납한 채 어른 키보다 높이 쌓인 매매자료를 뒤져”나갔다. 그러는 동안 현대중공업 뿐만 아니라 현대상선도 역시 주가조작에 개입했음을 알아냈다. 두 기업의 이사급을 포함해 관계자 20여명을 불러 진술도 청취했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이 ▷대량의 저가(低價)
매수 공세 ▷계열사간의 통정(通情)
매매 ▷장이 마감되기 직전 종가(終價)
올리기를 위한 대량 매수주문 등 주식시장에서는 고전적인 수법들을 모두 동원해 주가조작을 시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금감위와 나중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이같은 수법들은 단순히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매수 공세를 넘어 현대전자 주식이 인기있는 종목으로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동원됐다. 또 이를 위해 현대측은 3천6백여 차례나 주식거래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직전가보다 높은 가격에 매수 주문을 내는 방법으로 1만4천8백원이던 주가를 최고 3만2천원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현대측은 종가(終價)
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장이 마감되기 직전 대규모 매수 주문을 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저가 매수공세는 매매가 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낮은 가격에 수만주씩 대량 매수주문을 내는 수법. 사정을 모르는 일반 투자자들이 보면 마치 현대전자 주식의 매수세(買受勢)
가 활발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특히 시초가(始初價)
형성을 위한 동시호가 때는 금액이 공개되지 않고 잔량만 나타나는 점을 이용해 마음껏 주문을 냈던 것으로 분석됐다.

통정매매 역시 주식거래가 활발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편법. 현대증권이 관리하는 계좌와 계좌끼리 서로 맞는 가격·물량을 짜맞춰 놓고 그에 따른 매수·매도 주문을 내 매매가 체결되도록 하는 수법이다. 현대측은 모두 59차례나 통정매매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4월7일. 두달여의 조사작업 끝에 금감원은 현대중공업·현대상선 등 2개 계열사가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현대전자 주식의 시세를 조정(주가조작)
한 혐의를 포착했다고 발표했다. 현대중공업은 2천억원, 현대상선은 2백억원 가량의 자금을 각각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런 시세조정을 통해 현대전자 주가가 당초 1만4천원대이던 것이 3만2천원대까지 2백% 이상 상승했다고 밝혔다.

4월8일 오전 7시에 서울 계동 사옥에 출근한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에 대한 보고를 들은 뒤 “원칙대로 침착하게 대처하라”고만 지시했다. 현대측의 공식적인 반응이 처음 나온 것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현대측은 “주가조작을 했다면 값이 오른 주식을 팔아서 이익을 챙겼어야 하는데 여전히 해당 계열사들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히고 “주가조작이 아니라 계열사가 자금운용 (마치 개인이 재테크를 하듯)
차원에서 주식투자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측은 따라서 단순히 주가를 ‘관리’한 것을 법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다른 기업들도 유상증자를 하면서 일반적으로 주가를 올리는데, 그런 행위가 처벌받지 않았다는 ‘형평성 문제’를 시비삼는다. 신주 공모가격을 높이기 위해 유상증자 신주 배정 기준일 직전에 30% 정도 주가를 높이는 것은 업계의 관행이라는 얘기다. 현대측은 사건을 조직적인 ‘작전’으로 몰고가는 것에 대해서도 반발했다.

현대측은 또 “주가조작으로 인한 피해자도 없고, 앞으로 계열사들이 보유한 주식을 ‘투자’ 차원에서 장기보유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이같은 현대의 입장은 나중에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고, 급기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구속될 때까지도 시종일관 유지된다)
.

금감원 조사를 통해 주가조작 혐의가 드러날 경우, 해당 사건은 통상 금감위의 심사조정위원회 심의→금감위원장 결재→증권선물위원회 의결을 거쳐 검찰에 통보되거나 고발된다.

현대 주가조작 혐의는 4월14일 심사조정위를 거쳐 4월19일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보고됐다. 그리고 이틀 후인 4월21일 증권선물위의 의결 후 현대중공업·상선 두 법인과 법인 대표들이 검찰에 고발됐다. 주가조작의 창구였던 현대증권에 대해서는 ‘불법거래 매매주문을 받아준’ 데 대해 담당직원(停職)
과 부장급 법인영업팀장(減俸)
을 문책했다.

금감원의 조사업무가 시작된 지 14년만에 재벌그룹 계열사를 처음 고발했다는 점, 비교적 신속하게 (통상 웬만한 사건 조사도 3개월 가량 걸린다)
일을 처리했다는 점, 그리고 당초 증권거래소가 통보해 온 조사대상 기간과 조사대상 기업을 추가‘발굴’했다는 점 등에서 금감원의 조사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건을 접수해 검찰에 고발할 때까지 금감원이 ‘다루지 않은’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 왜 현대전자 계열사들이 동시에 현대전자 주가를 조작하려 했는가라는, 주가조작의 목적이 조사되지 않았다. 둘째, 현대 계열사들이 동시에 주가조작에 나선 데 비춰 틀림없이 배후나 주도자가 있었을 터인데 이 부분 역시 조사가 없었다. 셋째, 주가조작의 창구인 현대증권과 관계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재벌 구조조정의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는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이 일에 대해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박태희 국장과의 일문일답.

─ 현대 계열사들이 주가를 조작한 목적에 대해서는 왜 조사하지 않았나.

“금감원의 역할은 의도적인 시세조정, 즉 주가조작 사실이 있었는가 여부를 조사하는 것이다. ‘왜 주가조작을 시도했는가’라고 할 경우 물론 주가를 의도적으로 올려 이익을 보려는 것이다. 표면의 그 이유 말고, 이면의 목적 부분은 금감원의 조사 대상이 아니다.”

─ 조작을 주도한 사람을 밝혀내려는 시도가 있었는가.

“누가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하는가를 밝히려는 노력은 있었다. 그러나 수사권을 가진 검찰과 달리 우리는 청문(聽聞)
조사만 할 수 있다. 대기업의 복잡한 내부 사정 같은 진술을 받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불러 조사한 관계자들마다 한결같이 ‘주가조작이 아니라 자금운용, 말하자면 기업의 재테크를 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 이상 우리가 그들을 윽박질러 다른 진술을 받아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주도자 부분은 검찰 수사로 넘겼다.”

─ 나중 검찰 수사에서 이익치 회장, 박철재 상무 등 현대증권이 이 일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고 또 현대증권이 실제 주식거래의 통로이기도 했는데 금감원 조사에 왜 현대증권은 포함되지 않았나.

“금감원은 기구 성격상 문서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만 조사 대상으로 삼는다. 또 명확하게 밝혀진 결과만 검찰에 고발한다. 현대증권이 주가조작에 개입했다는 자료상의 물증이 없었고 관계자 진술에서도 현대증권에 관해서는 어떤 내용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금감원에서 검찰에 어떤 사건을 고발하면 그 내용이 그대로 언론에 보도된다. 그런 터에 짐작이나 ‘정황’만으로 고발했다가 나중에 무혐의로 판명되면 검찰과 달리 우리는 법적 문제에 휘말릴 수 있다. 현대의 경우도 현대증권이 개입했다는 증거나 진술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사할 수도, 고발할 수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 항간에서는 ‘재벌개혁 및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현대의 구조조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때렸다’는 소문이 있다.

“뭘 모르는 소리다. 조사업무는 국장의 지휘로 독자적으로 이뤄진다. 금감위원장이 개별 사건에 대해 일일이 신경쓸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조사기간이나 조사방향 같은 것도 국장과 조사팀이 결정하고 추진한다. 조사작업이 끝나면 그때 가서야 금감위원장에게 사후보고할 뿐이다. 현대 건도 조사가 끝나고 검찰에 넘기기 전에 보고했다.”

─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해 달라.

“4월21일 수요일에 증권선물위가 열려 검찰에 넘길 사안을 의결했다. 그에 앞서 증권선물위에 올릴 사항을 그 직전 토요일 아니면 월요일에 보고했는데, 아마 월요일(4월19일)
일 것이다. 내가 직접 조사결과를 들고 올라가 보고했다. 위원장께서 ‘정확하게 조사했는가’라고 물은 뒤 ‘그러면 원칙대로 처리하라’고만 했다. 그게 전부였다.”

금감원이 밝혀낸 현대의 주가조작 행위 부분은 나중 검찰의 수사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절차상 남은 문제는 누가, 왜 그런 범죄를 행했는가였다. 그것은 4월27일 검찰의 숙제로 넘어갔다.

권태동 월간중앙 기자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7호 19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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