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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2> 당 제국의 수도 시안(西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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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당(唐) 현종과 양귀비(楊貴妃)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의 무대이자, 진(秦)-한(漢)-당(唐)으로 이어졌던 화려한 중화제국의 수도.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해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이끌어내 공산당의 궤멸을 막아준 시안사변의 현장이었던 천년 고도 시안(西安)으로 중국 도시 이야기 두 번째 여행을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23조8000억원, 대명궁 복원 사업

강한성당(强漢盛唐)으로 불리는 화려했던 시절 중화제국의 수도였던 시안. 명(明)대에 조성된 높이 12m, 너비 12~18m, 길이 14㎞의 성벽이 보존돼있다. [중앙포토]

중화인민공화국의 61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지난 9월 30일 오전. 시안시 동북쪽에 자리 잡은 당나라 대명궁(大明宮) 유적지의 함원전(含元殿)과 단봉문(丹鳳門) 사이의 광장. 베이징 천안문 광장보다 넓은 이곳에서 자오러지(趙樂際) 산시(陝西)성 당서기를 비롯해 내외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명궁 국가 유적지 공원 개원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대명궁은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과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李淵)을 위해 여름 궁전을 지은 데서 유래한다. 공사는 고조가 죽자 중단됐지만 20년 후 고종이 완공시켰다. 고종이 자신의 지병인 류머티즘 치료와, 부인 측천무후에 의해 살해당한 비빈들의 원한을 피하기 위해 대규모 궁궐 신축 공사를 재개한 것이다. 대명궁은 면적 3.2㎢로 베이징 자금성의 4.5배, 프랑스 루브르 궁전의 8배 규모를 자랑한다. 2007년 10월 복원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개원했다. 개장일부터 국경절 연휴였던 10월 7일까지 150만 명이 찾았다. 공사 총액은 1400억 위안(약 23조8000억원). 2012년까지 3단계 공정이 완료되면 시안시의 센트럴 파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건국 60주년이었던 지난해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역사 다큐멘터리 ‘대명궁’ 6부작을 방영했다. “구중궁궐 대문이 열리고, 만국의 벼슬아치들이 황제께 절을 올린다(九天閶闔開宮殿, 萬國衣冠拜冕旒)”며 왕유(王維)가 노래했던 세계 제국의 수도 장안(長安)의 화려한 영화가 재현되는 셈이다.

진시황릉, 그 비밀의 문이 열리다

대명궁 공원 개원식이 열렸던 30일 오후에는 시안시에서 동쪽으로 35㎞가량 떨어진 린퉁(臨潼)현에서 진시황릉 유적지 공원 개원식이 열렸다. 1974년 가뭄으로 식수가 마르자 우물을 파던 농부가 우연히 발굴한 병마용갱에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진시황릉을 본격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진시황릉은 1·2·3호 갱이 일반에 공개됐고, 7호 갱까지 발굴 중이다. 지난해부터는 1호 갱의 추가 발굴이 본격적으로 재개된 상태다. 진시황릉 유적지 공원 건설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액수는 7억7000만 위안(약 1308억원). 내년에는 공원 안에 예능인 토용 전시관, 문관 토용 전시관, 전차 토용 전시관 등이 문을 열 예정이다. 시안은 최근 ‘시안 컨센서스(西安共識)’라는 유적지 발굴 모델을 제창해 전국적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인생에서 일흔 살은 예로부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라고 노래했던 곡강지(曲江池)를 복원하면서 주변에 고급 주택단지를 조성해 분양에 성공했고, 대명궁을 복원하면서도 인근의 대규모 개발에 나섰다. 역사 유적의 도시 시안이 유적지 복원과 경제적 효과 극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모델을 제시하자 전국적으로 역사 유적지 복원 붐이 일어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진시황릉 복원 프로젝트에서는 중국 최초의 통일 황제를 부각시킴으로써 대만과 양안 통일의 초석을 닦겠다는 노림수까지 읽힌다.

황성으로 가는 주작대로, 폭 150m 48차선 규모

지난해 9월 신중국 성립 60주년을 맞아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된 다큐멘터리 ‘대명궁’의 한 장면.(위) 진시황릉 1호 갱의 병마용. 시안시는 최근 진시황릉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과 공원 조성에 착수했다.(아래)

당 제국의 수도였던 장안성은 서기 637년 인구가 40만 명이 넘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장안성은 철저한 계획도시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음양오행 이론이 응축된 성곽의 집합이었다. 성안에는 사각형으로 이뤄진 108개의 방(坊)과 동시(東市)·서시(西市), 직선으로 쭉쭉 뻗은 가로가 있었다. 황제의 거처인 궁성(宮城) 태극궁(太極宮) 앞에는 황제의 집무실인 황성(皇城)이 자리 잡았다. 궁성과 황성의 크기가 명(明)·청(淸)대에 개축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시안성곽과 비슷한 규모였다.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에서 시작되는 주작대로(朱雀大路)는 당 제국의 중축선(中軸線)이었다. 도로는 폭 150m, 길이 5020m의 초대형 규모였다. 지금 서울 광화문광장이 생기기 전 세종로가 16차선 50m였던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부터 1390여 년 전에 서울에서 가장 넓은 도로보다 3배나 넓은 48차선 폭의 도로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사신과 상인들을 맞이했던 것이다.

호희(胡姬)·양귀비·측천무후…시안의 여인들

시안은 서주(西周), 진(秦), 전한(前漢), 신(新), 서진(西晋),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진(後秦), 하국(夏國),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서역에서 온 외국인들이 넘쳐나는 국제도시 코스모폴리스였다. “부잣집 자제들이 시내의 동쪽으로, 은 안장 백마에 얹고 봄바람 건너간다. 낙화 두루 밟고 어디로 놀러 가나? 웃으며 들어가네 호희(胡姬, 이국 여인)의 술집 안으로(五陵年少金市東, 銀鞍白馬度春風, 落花踏盡遊何處, 笑入胡姬醉肆中).”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소년행(少年行)’에서 읊었듯이 당대 장안에는 외국 여인네들이 손님을 맞는 술집들이 적지 않았다. 당나라의 호희는 지금의 이란에서 온 서역 출신 여인들이었다. 당시는 이국 풍속이 크게 유행해 페르시아풍의 옷, 장식,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마치 서양의 팝이나 한국 가요가 현대 중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도 이슬람 사원 청진대사(淸眞大寺) 인근에서는 서역의 이국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하늘에선 (눈과 날개가 하나뿐이어서 짝 짓지 못하면 날지 못하는) 비익조 되기를 원하셨죠(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뿌리는 달라도 가지가 서로 얽힌) 연리지 되기를 원하셨죠(在地願爲連理枝). 하늘과 땅이 영원하다 하나 다할 날이 있지만(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사라지지 않으리(此恨綿綿無絶期).” 백거이의 시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60여㎞ 떨어진 곳에는 장한가의 주인공 양귀비의 묘와 사당이 있다. 당 현종의 며느리로 들어왔음에도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그녀는 수양아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이곳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그녀의 묘는 봉분이 벽돌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인근에 살던 얼굴이 못생겨 시집조차 못 간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양귀비묘에 와 얼굴을 묻고 울다 집에 돌아가 얼굴에 묻은 봉분의 흙을 닦자 아름다운 얼굴로 변했다. 이 소문이 돌자 너도나도 양귀비묘의 흙을 파다 바르기 시작했다. 이에 봉분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관청이 나서 묘를 벽돌로 둘렀다.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났던 화청지(華淸池)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쓴 장한가가 비석에 새겨져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시안에는 미인뿐 아니라 여자 호걸의 유적도 전해온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남편인 고종과 함께 안장된 건릉(乾陵)이 바로 그곳. 두 명의 황제가 하나의 능에 합장된 것은 세계적으로 건릉이 유일하다. 평지에 능을 만들지 않고 해발 819m의 양산(梁山)을 파서 능으로 삼았다(以山爲陵).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남기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무자비(無字碑)가 전해온다. 또, 청 말의 권력자 서태후(西太后)가 의화단의 난을 이유로 베이징에 난입한 8국 연합군을 피해 이곳에 시안에 피란을 와 머무는 동안 즐겨 먹었다는 만두 전문점 덕발장(德發長)도 유명하다.

서부대개발의 중심, 다시 찾아온 ‘장안의 봄’

“장안의 봄은 본래 임자가 없으니, 옛날부터 홍루(주점)의 여인들 차지라네(長安春色本無主, 古來盡屬紅樓女).” 위장(韋莊)은 ‘장안의 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당나라 때 장안에 모란이 피는 봄이 오면 마치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열풍처럼 모란 사재기가 유행했다. 과거 모란과 호희들로 북적이던 시안에 다시 봄이 온 듯하다. 시안시는 2011년부터 시작되는 12차5개년 경제개발 기간 동안 국제화 대도시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시안에서 간쑤(甘肅)성 톈수이(天水)까지 이어지는 관중-톈수이 경제구를 서부 대개발의 중심 기지로 만들겠다는 야심도 밝혔다. 2020년까지 연평균 12% 성장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전국적인 고속철도 건설 붐에 힘입어 아시아 최대의 철도역사 건설도 추진 중이다. 중원(中原)이란 이름에 걸맞게 신장(新疆)에서, 홍콩까지 전 중국 어디라도 1일 생활권으로 연결할 계획이다. 수많은 박물관과 사각의 성벽이 미래의 중국과 오버랩되는 도시가 바로 천년 고도 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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