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9) 민둥산 녹화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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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뒤쪽 가운데)이 1958년 5월 30일 강원도 영월탄광을 방문해 광부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땔감을 나무 대신 석탄으로 바꿔 연료 근대화뿐 아니라 산림 보호도 꾀했다. 영월 일대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수송하기 위한 철도의 건설은 국군 공병대가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3권]


당시 일본에서 만들던 비료는 ‘쓰바메’라고 불렸다. 쓰바메는 일본말로 제비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제조된 것을 미군이 사들여 한국으로 보낸 화학비료에는 이 제비가 그려져 있었다. ‘제비표’ 일본제 화학비료가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광경에 이승만 대통령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것이다.

 나중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대한민국은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받는다. 그때 이 대통령이 미국에서 제공한 이 차관으로 가장 먼저 손을 대는 게 충주비료 공장 건설이었다. 한국이 산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 전통적인 농업 분야에서 일본의 비료를 계속 사다가 써야 하는 게 영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 대통령의 저 깊은 바닥 어디론가부터 솟아오르는 일종의 골기(骨氣)에서 비롯하는 반응이었다.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이 대통령인지라 대한민국 농업의 바탕이 되는 비료를 일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일본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자존심으로 따지자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객관적인 현실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출범한 뒤 겨우 두 돌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맞은 전쟁으로 여기저기 참혹하게 부서지고 깨진 대한민국이었지만 재건(再建)의 노력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방 부대를 시찰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군 지휘관들에게 자주 하던 말이 “저 산들을 봐라. 저기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통령은 옆에서 수행하던 내게도 자주 그런 말을 했다. 그분은 늘 “우리 땅의 산림(山林)이 너무 피폐(疲弊)해 있어. 나무를 빨리 심는 수밖에 없다고…”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중인 1951년 4월 5일 식목일 행사에서 나무를 심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 대한민국의 산은 대개 민둥산이었다. 지금도 북한을 방문한 사람이 찍어온 자료사진을 보면 북한 땅의 산은 거의 모두가 헐벗은 모습이다. 금강산이나 묘향산 등 북한 정부가 특별히 관리하는 일부를 빼놓고는 대부분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나 있지 않은 헐벗은 산야다. 당시의 대한민국이 그랬다. 조선에서부터 줄곧 이어져 온 모습 그대로였다. 산에서 땔감을 마련하는 생활습관이 부른 일종의 재앙이었다. 아주 인적이 드문 깊은 산에 가야 나무가 우거진 숲을 만날 수 있었지, 서울 등 대도시 인근의 산은 당시의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헐벗고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먼저 땔감을 공급하는 게 우선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불을 피우지 않도록 땅 속에서 탄(炭)을 캐내 민간인들이 이를 연료로 사용토록 하는 조치를 먼저 취해야 했다. 헐벗어 추위에 몰리면 산림에는 당연히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원도 일대에 풍부하게 매장된 탄을 캐야 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원도 영월 일대의 탄광을 제대로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석탄 캐기 작업은 국군과 무관치가 않았다. 영월 탄광으로 향하는 기본적인 철도 노선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는 국군의 공병이 동원돼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우리 국군은 급격히 공병의 규모와 실력을 증강하는 중이었다. 각 사단의 공병 대대는 물론이고, 최상위에는 건설공병단을 만들어 국가적인 규모의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힘을 보태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군에도 커다란 과제였던 셈이다. 당시의 대한민국이 놓였던 상황으로 볼 때 그런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영월에서 탄광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탄을 캐낸 뒤 전국 각지로 실어 보내야 했다. 당시 석탄은 우선 세 군데로 보내졌다. 서울에는 이문동과 구로동에 저탄장을 마련하고 철도를 이용해 직접 실어 날랐다. 대구에는 하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저탄장을 설치해 역시 철도 운송으로 석탄을 받았다. 나머지 다른 한 군데는 묵호였다. 영월에서 철도로 실어 날라 대형 저탄장에 쌓아 두었다가 해상(海上) 운송을 통해 부산과 전남 일대로 보냈다. 모든 것이 공병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군은 서울과 영월을 잇는 각종 철로를 확장하거나 보수하는 한편으로, 영월과 묵호를 잇는 철로도 건설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뒤인 1949년 식목일을 법정 공휴일로 제정해 반포했다. 대한민국의 산림을 헐벗은 상태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점에 이처럼 일찍 눈을 뜬 분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 작업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국방부 차관을 지내다 물러난 뒤 신설 육본관리부 책임자로 임명됐던 인물이 김일환 전 상공부 장관(1914~2001)이다. 김 장관은 이 산림 녹화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던 덕분이었다. 그는 초기 영월 탄광 개발을 주도하다가 상공부 장관에 오른 뒤 ‘석탄개발공사’를 세워 대대적인 탄광 개발에 나섰다. 정부의 그런 조치로 산에서 직접 나무를 잘라다가 땔감으로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값이 비교적 싼 연탄이 새로운 연료로 등장했고, 정부는 그 기회를 활용해 대대적인 조림(造林)을 추진할 수 있었다.

 요즘의 대한민국 땅은 푸르름 그 자체다. 모든 산은 아주 잘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하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신속하게 녹화(綠化)사업이 국가 규모로 이뤄진 예가 드물 것이다. 보통 산림 녹화를 거론하면 우선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박 대통령의 철저한 정책 추진이 대한민국의 산야를 푸르게 가꾼 것은 맞다. 그러나 석탄으로 땔감 문제를 해결하면서 대규모 조림의 가능성을 연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 밑에서 미군의 장비와 기술을 얻어다가 사용법을 익혀 석탄 수송용 철로를 깐 사람들은 그 시대의 국군 공병이었다. 대한민국의 1950년대는 북한의 남침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국가의 초석을 다지면서 대한민국은 어느덧 조용하지만 힘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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