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계약은 유효” 인정 … 은행 판정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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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기각 99 대 인용 19’. 2년 넘게 끌어온 키코(KIKO) 소송에서 은행이 판정승을 거뒀다.

 법원은 은행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핵심 쟁점인 키코의 불공정 계약 여부에 대해서도 “불공정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118개 기업 중 은행으로부터 배상을 받게 된 기업은 19곳뿐. 그나마 손실금액의 20~50%만 배상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키코 소송을 낸 기업은 200여 곳으로, 손실액은 2조3000억원에 달한다. 아직 80여 건의 키코 소송이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 패소한 기업들은 항소할 뜻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오랫동안 기록과 주장을 검토해 나온 것이어서 이를 뒤집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기업들은 아직 남아 있는 형사소송에 희망을 걸고,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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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공정 계약 아니다”=“키코는 애초에 팔지 말았어야 하는 상품이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그동안 이런 주장을 해왔다. 키코는 원화값이 일정 구간 안에서 움직일 때 기업이 이익을 보는 상품이다. 대신 원화값이 급락해 일정 선을 넘어서면 은행에 물어야 하는 금액이 제한 없이 불어난다. 이익은 한정돼 있는데, 손해는 무제한이므로 일방적으로 기업에 불리한 불공정 계약이라는 게 공대위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를 근거로 이들은 계약 자체를 무효로 해달라며 소송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키코는 기본 구조가 불공정하거나 환헤지에 부적합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키코 상품은 이익에 상응하는 위험을 담고 있으므로 어느 쪽에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키코가 주로 판매된 2007년과 2008년 상반기에 원화값이 안정적이었다는 것도 이런 결정의 근거가 됐다. 금융위기로 원화값이 한때 달러당 1500원대까지 떨어졌지만, 이는 계약 당시엔 예상치 못했던 나중 일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은행이 키코로 폭리를 취했다는 기업 측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대위에 따르면 은행들은 키코를 팔면서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제로 코스트(Zero Cost)’ 상품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상품 가격에 수수료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은행이 계약금의 0.3~0.8%를 수수료로 챙긴 건 과도하지 않다”며 “기업도 은행이 어느 정도 이윤을 남길 거란 점은 예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키코 마진율은 다른 금융상품(예금·대출·펀드)보다 낮고, 마진율을 고객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는 은행 쪽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불완전 판매는 은행 책임=법원은 일부 기업에 대해서는 은행이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기업이 키코에 가입하기 적합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가입을 권유했거나, 키코의 손실 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다.

 이번 판결에 따르면 A은행은 B기업의 수출실적이 월평균 15만 달러 수준인 걸 알면서도 월 40만 달러어치의 키코에 가입하도록 유도했다. C은행은 D기업이 이미 키코에 가입해 손실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추가로 키코를 체결해 손실을 보전하라고 권유했다. 금융회사가 기업의 상황에 맞지 않는 거래를 권유해선 안 된다는 ‘적합성의 원칙’을 위반한 사례다. 법원은 이런 경우 은행이 키코로 인한 손실액을 일부 배상토록 했다.

 하지만 은행의 책임은 손실금액의 20~50%로 제한됐다. “투자의 최종 판단은 투자자의 책임인데도 이를 게을리한 수출기업의 과실이 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은행 측은 이번 판결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국은행연합회 이병찬 경영지원부장은 “처음부터 은행 측이 압도적으로 승소할 것으로 예상했다”며 “이번 법원의 판결은 키코가 적합한 환헤지 상품이며, 대부분 은행은 고객 보호 의무를 다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패소한 중소기업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조붕구 코막중공업 대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판결”이라며 “항소를 통해 진실을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코 공대위는 이날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공대위에 따르면 이미 160여 개 기업이 4개(씨티·SC제일·외환·신한) 은행을 사기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이상재·한애란 기자

키코 분쟁 일지

◆2008년

6월 11일 8개 중소기업, 공정위에 키코 계약 ‘불공정’ 약관 심사 청구

7월 25일 공정위 “키코, 약관법상 문제없다” 판단

8월 20일 중소 수출업체 S&T모터스, SC제일은행 상대 첫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10월 28일 일부 기업, 키코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11월 3일 수산중공업 등 100여 개 기업, 13개 은행 상대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 일괄 제기

12월 30일 서울중앙지법, 모나미 등이 낸 ‘키코 효력 정지’ 가처분 일부 인용(은행 측 책임 첫 인정)

◆2009년

1~4월  서울중앙지법 10여 개 기업의 키코 가처분 신청 선별적 인용

8월 23일 서울고법 ‘키코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항고심 첫 기각(2심 첫 판단)

12월 17일 중소기업 측 증인 엥글 미 뉴욕대 교수 “키코는 은행에 유리한 불공정 파생상품” 증언

◆2010년

1월 21일 은행 측 증인 스티븐 로스 미 MIT대 교수 “키코는 기업에 일방적으로 불리하지 않아” 증언

2월 8일 서울중앙지법, 수산중공업-우리·씨티은행 부당 이득금 반환청구 본안 소송 “키코 계약 부당하지 않아 유효” 원고 패소 판결

11월 29일 서울중앙지법 “불공정 상품은 아니나 설명 의무 위반에 따른 책임은 져야”

◆키코(Knock In Knock Out)=원화가치 변동에 대비하기 위해 기업이 가입하는 파생금융상품. 원화가치가 일정한 범위를 유지하면 기업이 이익을 얻는다. 원화가치가 정해 놓은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녹 인) 기업은 손실을 보고, 원화가치가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계약은 해지된다(녹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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