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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토크 21] 스와로브스키

중앙일보

입력

크리스털 하면 바로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다. 스와로브스키다. 1895년 오스트리아의 유리세공사 다니엘 스와로브스키(Daniel Swarovski, 18621956)가 티롤주의 와튼즈(Wattens,현지 발음으로는 바텐즈)에 세운 크리스털 제조회사다. 조그만 장식품부터 패션제품에 이르기까지 130가지의 다양한 제품군을 보유하고 세계 주요 도시마다 매장을 가지고 있다. 제품이 화려하다 보니 매장은 그 어떤 곳보다 휘황찬란하다. 그냥 한번 들러본 사람은 물론 보석을 사려고 들어온 사람들마저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온갖 제품이 형형색색으로 고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스와로브스키의 힘은 기계에서 나왔다. 어쩌면 장인정신보다도 기계, 기술의 힘이 명작을 빚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밑에서 유리 세공작업을 배우던 다니엘은 1895년 전기로 크리스털을 자르는 혁신적인 커팅기계를 발명해 냈다. 그는 이 기계의 비밀이 샐 것을 우려해 시골 마을인 와튼즈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회사를 설립했다. 현재 그의 4대 손인 헬무트 스와로브스키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스위스 시계 공업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영진 8명 중 6명이 패밀리다.

크리스털 커팅기계의 개발에서 오늘날 스와로브스키의 화려함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가공작업은 모두 손으로 이뤄졌다. 다니엘의 커팅 기계는 전기가공 방식으로 크리스털을 대량으로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크리스털의 품질은 원재료의 배합률과 컷팅기술, 그리고 컬러로 결정된다. 스와로브스키가 명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이 세 가지가 모두 세계 최고라는 말과 다름없다.

먼저 크리스털의 투명도와 굴절률을 높여주는 비결은 원재료의 배합률에서 나온다. 크리스털은 유리(규석)와 탄산칼슘(석회석), 탄산나트륨(소다회) 그리고 산화염(Pbo)을 배합해 만들어진다. 따지고 보면 보석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석이라고 하는 것은 천연 광석 또는 광물질을 연마한 것이다. 크리스털도 물론 자연산이 있다. 이것은 다이아몬드보다 싸지만 가공하기 쉽지 않아 광채도 적고 다양한 컬러를 내지도 못한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유리 크리스털이다.

유리 크리스털은 유리보다 단단하고 보석에 비해 저렴하며 천연 크리스털보다 다양한 색상과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다. 스와로브스키 제품이 그렇게 화려하고 각양각색으로 나올 수 있는 것도 바로 인조 크리스털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유리 크리스털은 배합률에 따라 투명도, 굴절률, 무게감, 청아한 소리가 결정된다. 산화염이 5% 정도 섞인 것을 하프 크리스털이라고 하는데, 이 함유량이 높을 수록 투명도와 굴절률이 높아지고 청아한 소리가 난다.

산화염이 24%이상이면 풀 크리스털이라고 하는데, 스와로브스키의 목걸이는 산화염이 최소 32%라고 한다. 이런 제품은 완전 투명 무색인데도 빛의 반사에 따라 무지개빛이 연출된다. 코카콜라사의 콜라 제조비법이 절대 비밀이듯 스와로브스키의 황금 배합률도 공개된 적이 없다.

둘째, 커팅기술이 뛰어나다. 크리스털의 이상적인 컷팅면 수는 28개라고 한다. 이때 가장 많은 반사광이 생기기 때문이다. 다른 크리스털 제조업체들은 평균 12면 컷팅기술을 가지고 있는 반면 스와로브스키는 28면 컷팅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어떤 스타일로 커팅할 수 있느냐는 점에서도 스와로브스키는 돋보인다. 다른 회사들은 대부분 기본 스타일로만 커팅하는 정도인데, 14가지의 다른 스타일로 커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포인트는 크리스털에 얼마나 다양한 컬러를 빼어나게 입히느냐는 것. 크리스털 고유의 투명함을 유지하며 다양한 컬러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기술인데, 이 부문에서도 스와로브스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와로브스키는 그동안 두 번의 큰 위기를 맞았는데,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첫번째 위기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젊은이들이 징발되고 전장에서 죽는 바람에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1919년 전쟁에서 패했을 때 오스트리아 국민은 25% 정도가 줄었다.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위기였다. 노동력 조달 문제를 고민하던 스와로브스키는 이때 발상의 전환을 한다. 크리스털 커팅기계를 변형시켜 연마기계를 개발한 것이다. 노동력에 의존하던 연마작업을 기계가 대신함으로써 노동력 절감과 균질한 제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스와로브스키는 자체 수요를 충족하는 것은 물론 이 기계를 원하는 기업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자회사가 티롤릿(Tyrolit)이다. 이후 티롤릿은 스와로브스키 전체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두번째 위기는 1970년대 석유파동이었다. 생산원가는 높아지고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가공연마기계와 크리스털 제품을 기업에 팔던 스와로브스키의 매출도 타격이 컸다. 경기침체가 깊어가던 1975년 스와로브스키는 투명 접착제를 발명한다. 크리스털 작은 조각들을 감쪽같이 붙일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이 접착제를 사용해 스와로브스키는 이듬 해 쥐 모양의 크리스털 마우스를 만들었다. 마침 그 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제12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스와로브스키는 이 아이템을 올림픽 경기를 구경 온 사람들에게 팔았는데,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 제품은 그동안 기업만을 상대로 장사하던 스와로브스키가 일반 소비자로 시장을 넓히는 시발이 되었다. 크리스털 마우스는 또 식기와 고급 장식품에만 사용되던 크리스털을 다양한 분야로 확산시키는 계기도 됐다. 이후 곰 나비 기린앵무새 등 다양한 동물을 소재로 한 장식품과 기념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상복 기자(포브스코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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