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들이기” 발끈 … 아태 곳곳서 미중 충돌 예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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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04면

북한의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묘지와 마오안잉 동상. 연평도 포격 뒤인 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화를 보내 마오안잉 전사 60주년을 추모했다. 이 자리에는 김영춘 국방위 부위원장과 류훙차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가 참석했다. [신화통신=본사특약]

중국 외교의 얼굴인 양제츠(楊潔<7BEA>) 외교부장은 27일 마에하라 세이지 일본 외상,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연평도 포격 뒤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는데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다. 26일 오후엔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를 베이징 외교부 청사로 불러 연평도 사건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한국 방문을 취소한 다음 날이다. 중국 외교부 인터넷 홈페이지엔 ‘조선반도 사태에 대한 중국 측 입장’을 천명하는 짤막한 발표문이 올라 있다. 양 부장은 “중국은 남북한 교전 사태의 발전 양상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지 워싱턴함 서해 진입 후 중국의 외교전략은

주목할 대목은 남북 양측이 대화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한 것이다. 종전까지 ‘냉정과 자제’를 주문하던 자세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양 부장은 또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각각 전화통화를 한 사실을 공개했다. 김 장관에겐 “중국은 여러 차례 (미 항모의 서해 훈련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 항모의 서해 진입을 전후로 중국 외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셋째)이 10월 26일 중국인민지원군 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후계자인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오른쪽 둘째)을 비롯해 이영호 정치국 상무위원, 김영춘 정치국 위원, 김기남 당 중앙위 서기, 장성택 당 정치국 후보위원 등 25명의 간부가 총출동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시선도 연평도 충돌 현장으로부터 조지 워싱턴함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미 항모는 북한을 겁주지 못하고 동북아만 놀라게 할 것”(25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 항모의 진입이 관례화하면 동북아는 남북 포격전보다 더 심각한 각축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은 왜 조지 워싱턴함의 움직임에 민감할까.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중국은 ‘서해에서 시작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대만해협-남중국해-믈라카해협’을 잇는 다오롄(島<93C8>:island chain)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냉전시대에 미국이 설정한 ‘중국 포위선’을 뚫고 나와 해상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뿐 아니다.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을 제치는 2020년께 중국은 제해권(制海權)을 서태평양과 인도양으로 확대할 속셈이다. 대양해군(大洋海軍)의 기치 아래 항공모함 건조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중국 해군은 핵잠수함을 포함해 60척 이상의 잠수함을 갖고 있다. 매년 3척씩 첨단 잠수함을 건조 중이다. 국방비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난해 593억 달러, 세계 2위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인지 중국은 조지 워싱턴함의 서해 훈련을 미국의 대중 군사 압박으로 간주하고 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중국의 국력이 커지자 미국은 과거 일본에 그랬던 것처럼 ‘중국 길들이기’에 나섰고 중국은 강력히 맞서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럴 경우 미·중 양국은 아태 지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의 달라진 한반도 정책도 단단히 작용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지난해 7월 북·중 혈맹 관계를 유지하고 북한을 지렛대로 삼아 한·미·일 삼각동맹을 견제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마오안잉(毛岸英:마오쩌둥의 아들) 동상 제막식이었다. 지난해 10월 방북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를 필두로 북한을 방문한 중국 지도부 인사들은 예외 없이 그곳을 참배하고 있다. 지난달 방북한 궈보슝(郭伯雄) 중앙군사위 부주석도 동상 앞에서 군사협력을 다짐했다. 한국전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대규모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가서다. 그는 중국 군부의 최고실세 중 한 명이다. 그 무렵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으로부터 “한국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발언까지 나왔다. 반면 중국 내 친한파 인사들은 민감한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입을 다물고 있다.

문제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올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다. 최영림 내각 총리와 김기남 노동당 비서 등 당·정·군 간부들의 방중 행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북한이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연거푸 일으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중국 입장에선 김정일 사후 북한 체제가 붕괴돼 ‘통일 한국’이 출현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그럴 경우 주한 미군이 압록강 맞은편까지 올라간다면 중국은 대만과 한반도 양쪽에서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해야 할 판이다. 그런 중국의 속내를 파악한 김정일 은 무력 도발로 한반도 정세를 흔들고 있다. 3대 후계체제 구축,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완화, 한국 사회의 교란,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설정 등을 겨냥한 다목적 도발이다.

중국 지도부가 권력교체기에 들어가 국수주의 노선이 강해지는 현상도 작용하고 있다. 2012년께 시진핑 시대가 열릴 경우 중국은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을 앞세워 주한 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해체 등을 추진하는 시나리오까지 나온다. 집단지도체제의 속성상 미·중 대치구도에서 선명성 경쟁을 벌일 경우 동북아 정세는 더 복잡한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대응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커지고 있다. 윤덕민 교수는 “한반도 정세는 결코 한·미 대(對) 북·중 대결구도로 안정될 수 없다”며 “한·중이 이해를 함께하는 북한의 개혁·개방, 비핵화, 한반도 안정·평화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중국에 남북한 어느 한쪽을 택하라는 방식이 아니라 중국 국익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워 전략적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한·미 동맹이라는 단일 변수에만 기대선 안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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