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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울린 ‘이주민 어머니’의 표정…정부 지원 미술의 명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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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08면

1‘월스트리트 연회’(1928), 디에고 리베라(1886~1957) 작,프레스코, 멕시코 교육부, 멕시코시티

디에고 리베라(1886~1957)는 비운의 천재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가 재조명되면서 요즘은 칼로를 속 썩인 남편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 멕시코 벽화운동의 3대 거장으로 잘 알려진 화가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대담한 색조와 뚜렷한 선을 사용해 거대한 스케일의 프레스코 벽화를 공공건물에 그리곤 했다. 그가 벽화에 집중한 것은 민중이 장벽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17> 대공황이 불러온 뉴딜 아트

벽화라는 장르는 대중에게 가까운 만큼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리베라가 벽화 공부를 하면서 참고한 르네상스 시대의 프레스코 벽화는 대개 그리스도교 성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베라의 경우에는 토속적인 색채와 형태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면서 또 그가 지지한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했다. 공산주의 메시지는 자본주의 비판으로 시작하게 마련이어서 리베라 역시 그런 의도를 담은 벽화 ‘월스트리트 연회(사진 1)’를 그렸다.

정장을 한 세련된 남녀들이 테이블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연회의 유쾌함 따위는 없다. 일부는 기껏해야 야비한 미소를 지을 뿐이고 대부분은 아예 표정이 없다. 그 무표정 뒤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연회 중에도 긴 종이에 찍혀 나오는 주가를 체크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의 뒤로는 거대한 금고가 신성한 제단처럼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자유의 여신상은 왜소한 램프가 돼 이들의 연회를 비춘다. 숭고한 자유의 이념이 정글의 법칙 같은 시장 자유방임주의로 변질돼 돈 잔치에나 봉사한다는 리베라의 주장이 아닌가 싶다.

2 매사추세츠 알링턴 우체국의 벽화, WPA(미국 공공사업진흥국·1935~43년까지 뉴딜정책 실행 주도)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 3 ‘이주민 어머니’(1936), 도로시어 랭(1895~1965) 작, 흑백사진

리베라가 이 벽화를 완성한 것은 공교롭게도 월스트리트가 대재앙 직전의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이듬해인 1929년 10월 이른바 ‘검은 목요일’과 ‘검은 화요일’의 주가 대폭락이 일어났다. 이것이 전대미문의 경제 불황인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이어졌고 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덮쳤다. 그전에도 주가 폭락과 시장 침체가 있었지만 이렇게 대공황이 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만성적 과잉생산, 경기 사이클에 따른 소비와 투자 축소, 연방준비은행의 금융 긴축 등 여러 요소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그 근본적 원인이 시장의 한계 때문이냐, 정부가 지나치게 금융 긴축을 했기 때문이냐 하는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어쨌거나 대공황을 보면서 공산주의자인 리베라는 드디어 자본주의가 붕괴한다고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수정자본주의로 선회하며 생존을 모색했다.

여러 자유방임주의자들은 규제와 정부 지출이 대거 포함된 수정자본주의 자체가 자유의 축소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며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수정자본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는 “내가 정부 확대를 지지하는 것은 현존하는 경제적 기업들의 전체적 붕괴를 피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수단이며 개별 기업의 자주성이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라며 정부 확대는 시장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리베라는 본의 아니게 미국 수정자본주의 정책과 관계를 맺게 됐다. 33년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불황 타개를 위해 뉴딜(New Deal) 정책을 시작했는데, 그 일환으로 공공사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미술가들을 고용해 우체국 등 공공기관에 벽화를 그리게 했다(사진 2). 이것은 바로 리베라가 주도한 멕시코 벽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정부 지출에 의한 고용 증대 정책으로 대표되는 뉴딜에는 이렇게 미술 등 예술 프로젝트도 포함돼 있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줄 뿐 아니라 예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던 미국 서민들에게 예술을 선사하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뉴딜로 탄생한 미술작품들을 ‘New Deal Art’로 통칭하고 그중 특히 많은 벽화를 ‘New Deal Mural’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뉴딜로 그려진 공공기관 벽화는 수준과 질에서 논란거리가 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다지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지금은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

오히려 뉴딜아트의 뛰어난 작품들은 농업안정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FSA)에서 추진한 다큐멘터리 사진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FSA는 농민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사진가들을 고용해 대공황기 농촌의 피폐한 모습을 찍게 했다. 그 대표작이 후에 매그넘 회원이 된 여성 사진작가 도로시어 랭(1895~1965)의 ‘이주민 어머니(사진 3)’다. 랭이 이 사진을 찍은 것은 36년 싸늘한 초봄의 어느 비 오는 날, 캘리포니아주의 농촌 노무자 캠프에서였다. 사진 속 여위고 주름이 가득한 여인의 나이가 몇으로 보이는가? 이 여인, 플로렌스 톰슨의 나이는 당시 불과 32세였다. 랭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한 굶주리고 자포자기 상태인 어머니를 보고 자석에라도 끌린 것처럼 다가갔다. (중략) 그녀는 주변 들판의 얼어붙은 채소와 아이들이 잡은 새로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먹을 것을 사느라 차의 타이어마저 막 팔아 치운 상태였다. 옹송그린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는 그렇게 기울어진 천막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사진이 그녀를 도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듯했고 그래서 나를 도왔다(사진 찍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뜻). 우리는 동등하게 도운 셈이었다.”

‘이주민 어머니’가 일으킨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이 사진이 당시 몇몇 정부 규제의 위헌 판정으로 위기에 몰린 루스벨트가 재임에 성공하는 데 일조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이 사진이 그토록 성공한 것은 사회보장제도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선전한 것이 아니라 빈민의 고통이라는 인류 보편적 문제를 휴머니즘의 감수성으로 담아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이 사진이 대공황 당시 미국이라는 시공간을 떠나 나중에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한 어머니의 표상으로 쓰이곤 했다는 사실은 그 보편적 호소력을 증명한다.

이처럼 랭의 작품을 포함한 여러 FSA 사진은 정책 홍보용 사진의 한계를 뛰어넘은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다른 뉴딜 아트도 이런 성공을 거뒀는가? 프로파간다 성향이 짙은 다른 사진들이나 잊혀진 존재가 돼 버린 수많은 우체국 벽화는 어떤가?

뉴딜 아트의 성과에 대한 질문은 뉴딜 전반의 성과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며, 자유방임과 정부 기능 확대 사이에서 어느 지점에 서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와 뉴딜 아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문소영씨는 영자신문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팀장이다. 경제학 석사로 일상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즐거움이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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