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 솥에 서리태 넣고 보글보글...고소한 향에 윤기 자르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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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10면

11월의 마지막 주말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아무리 가을이라 우기려 해도 안 되는 시기가 되었다. 서둘러 김장을 마치고 겨울에 들어설 준비를 해야 한다. 이즈음 들녘에는 마지막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났을 게다. 게으르게 뒹굴고 있던 늙은 호박도 주인이 얼기 전에 주워왔을 테고, 노랗게 단풍 든 콩잎도 장아찌 재료로 거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두어야 하는 서리태도 이미 거두어 볕 좋은 맑은 날 며칠을 두고 말려놓았을 게다. 이제 정말, 달착지근한 서리태 햇것을 두어 맛있는 햅쌀밥을 해먹을 때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37> 눈과 입이 즐거운 햅쌀밥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말하기 힘든 것이 바로 밥이다. 그건 마치 물이나 공기 같은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든 것과 같다. 하지만 음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밥이다. 밥이 맛 있으려면 좋은 쌀을 선택해야 하는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건강한 쌀, 적절한 밥솥, 곁들이는 잡곡이다.

첫째, 밥솥 이야기. 나는 전기밥솥이나 전기밥통을 쓰지 않는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전기밥솥의 질이 좋지 않아 부스스한 밥이 싫은 나는 혼수품으로도 전기밥솥 대신 압력밥솥을 샀다. 그래도 전기밥통은 필요하지 않으냐 권유가 많았는데, 나 같은 게으름뱅이라면 전기밥통 속에서 누렇게 찌든 밥으로 연명할 것이 분명할 듯하여 이 역시 사지 않았다. 귀찮더라도 가능한 한 새 밥을 지어 먹고 찬밥이 남으면 뚝배기에 데워 먹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압력밥솥을 애용했는데 차지고 향이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밥이 질겨지는 것이 흠이었다. 특히 누룽지는 더욱 질겨 누룽지로서의 매력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행사장에서 4~5인분 크기의 앙증맞은 무쇠솥을 파는 것을 보고 냉큼 사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5년 이상 이 밥솥만 써왔다. 돌멩이에 내팽개쳐져 깨지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쓰지 않을까 싶다.

무쇠솥의 밥맛은 탁월했다. 부슬부슬거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질기지도 않았다. 밥 짓는 것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다. 한 5분 정도만 지켜봐 주면 된다. 쌀을 불려 솥에 안치고 센 불에 가열하면, 약간 끓으면서 이내 뚜껑 사이로 밥물이 한두 방울 흐르기 시작한다. 이때 불을 줄이고, 완전히 끓는다 싶으면 불을 가장 약하게 줄여 밥물이 하나도 넘치지 않게 한다. 이 과정은 모두 5분 정도에 끝난다. 이 상태로 그대로 두면 되니, 그리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햅쌀로 밥을 지으면 자르르 윤기가 흐르고, 햅쌀의 고소한 향이 솔솔 올라온다. 부드럽고도 차진 밥을 푸고 나면, 그 밑의 누룽지는 바삭바삭하고 고소하다. 따끈한 온기가 남아 있을 때의 이 가마솥 누룽지 맛을, 찬밥으로 일부러 눌러 만든 누룽지와 어찌 비하랴.

게다가 이 밥솥은 물 없이 가열해도 깨지지 않으니 호박고구마도 굽고 깨나 땅콩, 심지어 커피도 여기에다 볶는다. 여태까지 산 모든 식기 중에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감히 자부한다.

둘째, 건강한 쌀 이야기. 신혼 때부터 남편은 현미를 먹자고 했다. 현미 좋은 것이야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무래도 내 입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무리 잘 불려도 질기고 딱딱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만 현미밥을 먹으면 쌀알이 속까지 잘 퍼진 흰밥이 그리워 열흘을 못 넘기고 흰밥으로 되돌아왔고, 다시 반성하고 현미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한 것이 바로 가정용 도정기였다. 현미밥이 딱딱해지는 것은 밥을 지을 때 현미의 질긴 껍질이 빨리 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정기로 그것을 살짝 깎아주면 조금만 가열을 해도 껍질이 터지면서 속의 쌀알까지 부드럽게 퍼지는 것이다. 보통 백미라고 하는 것은 쌀눈까지 모두 제거될 정도로 많이 깎아낸 9분도미이고, 현미는 왕겨만 벗겨낸 0분도미이다. 7분도미나 5분도미를 파는 곳이 간혹 있지만 그리 많지 않고, 그것도 너무 많이 도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혹시 2분도나 3분도미 정도로 아주 조금만 깎아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도정기까지 사게 만든 것이다.

가정용 도정기는 현미를 넣고 도정하는 기계로, 믹서 정도의 크기다. 한 끼 분량의 쌀을 매 끼니 도정하는데 1~2분 정도 소요되니 시간타령 할 일도 못 된다. 갓 찧은 신선한 쌀로 지은 밥은 풍미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3분도 정도로 살짝 깎은 쌀은, 구수한 현미의 맛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밥알이 부드럽게 익는다. 현미의 향과 맛을 지니면서도 딱딱하거나 질기지 않은 밥이라는, 우리 부부의 오랜 숙원은 이렇게 도정기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셋째, 잡곡 이야기. 쌀은 사시사철 먹는 것이지만, 잡곡은 계절을 탄다. 여름이 되면 완두나 강낭콩을 사다 두고 먹고, 초가을이 되면 울타리콩을 먹게 된다. 가끔 옥수수도 알을 따서 밥에 얹고, 요즘에는 햇고구마가 나오면 숭덩숭덩 썰어 얹어 함께 밥을 하면 맛있다.

가을이 되면 온갖 잡곡이 햇것으로 나온다. 차조나 찰기장을 두면 밥이 부드럽고, 흑미는 향이 뛰어나며 차진 질감이 더해진다. 단 흑미는 마치 현미처럼 딱딱해 소화에 부담스러운데, 그 역시 도정기로 살짝 깎고 물에 충분히 불려서 해결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밥에 두어 먹는 잡곡의 최고는 서리태다.

서리태는 서리 내릴 때에나 거두는 검은콩이다. 껍질이 검은 콩에는 쥐눈이콩<20A9>흑태<20A9>서리태, 이렇게 세 종류가 있는데 초보자들은 흑태와 서리태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쥐눈이콩은 쥐눈처럼 작고 반짝반짝한 콩으로 약으로 쓰거나 콩나물 키우는 용도로 쓴다. 흑태는 흰콩보다 조금 크고 속이 노르스름하게 하얀 콩으로, 주로 콩자반 용도다. 그에 비해 서리태는 흑태보다 크기가 매우 크고 속살이 연두색이다. 초보자가 따로따로 볼 때는 헷갈릴지 모르지만 두 가지를 함께 놓고 비교하면 금방 구별할 수 있다.

서리태의 맛은 흑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착지근하여, 밥에 두어 먹기에는 최고다. 고동색의 밤콩이나 알록달록한 선비콩보다도 맛이 월등하다. 단, 값도 월등히 비싸다. 이제 시장에 서리태 햇것이 나왔을 것이다. 충분히 불린 서리태 얹어 햅쌀밥을 지으면, 밥 냄새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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