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과잉, 철학의 빈곤 시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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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31면

우리는 지금 이념과잉시대에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유·민주·평화·인권과 같은 가치의 실현을 놓고 정파 간에, 사회세력 간에 대립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놓고 보면 갖가지 이념이란 한갓 구호로 형해화돼 있고 그 실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함 때문에 그렇다. 또한 온라인 여론이 여론세계를 독점하는 상황에서 단편적 정보가 총체적 지식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또다시 철학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민주세력 대 반(反)민주세력, 평화세력 대 전쟁세력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은 20년도 넘게 그런 유치한 이분법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력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함께 이룩한 최초의 나라라고 공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이해진 군 기강과 나약해진 군인의식을 걱정하는 나라다. 연평도에 대규모 포격이 행해져 동료 군인이 전사하고 민간인이 행방불명된 바로 그날 저녁에, 휴가 나온 어느 사병이 TV 카메라 앞에서 “북한은 자제하고 이 사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이웃나라 외교관처럼 말하는 나라다.

인터넷이 막 확산되기 시작할 때 전 세계는 지식혁명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다. 손쉽게 찾을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는 ‘지식’은 지식기반 사회를 고도화할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천안함 폭침 이후 우리는 이런 기대가 허망했으며, ‘사실’ 그 자체보다는 누가 여론의 네트워크를 장악하는가에 따라 ‘사실’로 인정된다는 현실을 목도하게 됐다. 앞으로 “정상적 조건 아래에서 물은 섭씨 몇 도에 끓는가” 하는 문제도 다수결로 정답이 결정될 세상이 올지 모른다. 초급장교로 해군함정에서 복무했던 필자조차 기각할 수밖에 없는 가설로부터 엄청난 ‘황당 스토리’들이 제작됐다. 그리고는 곧 ‘진실’을 대체했다. 폭침 사태 직후의 좌초설이 그러했고, 맨 마지막 작품인 미국 잠수함 오발설이 그러했다.

씨티그룹 CEO를 지낸 월터 뤼스턴은 “빅 브러더가 시민을 감시한다는 조지 오웰의 예측과는 달리 이제 일반 시민이 빅 브러더를 감시하는 세상이 됐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새삼 그의 이야기에 동감이 간다. 지금 정보독점체로서의 국가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된 정보가 수적 우세를 통해 진실을 뒤덮는 현상이다. 전문적 학술지에는 근처에도 못 갈 이론이 인터넷의 힘을 빌리면 전 세계 학계의 공인된 이론을 엎어버리는 힘을 발휘한다. 대중에는 전자의 이론이 후자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래셤의 법칙이 사이버지식세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미디어의 다양화와 정보제공 원천의 대중화로 ‘내 마음에 드는 정보’만 골라서 섭렵하는 ‘미디어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진실과 정론이 설 땅은 그만큼 좁아지게 됐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복합사회를 설명하는 총체적 그림이 필요하다. “북한은 총체적이고도 일관된 전략 아래에서 사건들을 도발하는데 우리는 그런 그림이 없다.” 권위 있는 어느 국제정치학자의 분석이다. 천안함 폭침, 그리고 북한이 작심하고 공개한 농축 우라늄의 보유 실상, 뒤이은 연평도의 비극…. 이 모두가 북한의 생존전략에 따라 고도로 준비된 것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념으로서의 평화는 소리치지만 안전보장·평화의 실현을 위한 총체적 그림을 제시하지 못해 북측의 도발을 자초하고 있다.

둘째, 과거가 아닌 현재의 우리나라에 맞는 이념의 체계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맞는 민주·평화·인권, 미래 세대를 위한 의무는 무엇인지 구체적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 최소한 정치권이라도 철학을 갖고 진지한 토론을 벌여야 한다.

셋째, 양화의 양을 임계량(critical mass)만큼이라도 확보함으로써 악화의 유혹을 막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사이버 세계에서 지식의 질은 결정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네트워크에 흐르는 정보의 양이 보다 더 결정적이다.

사이버 영역의 확장으로 오히려 ‘천민 민주주의’로 흐르는 현실을 극복하고 ‘숙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지식강국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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