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광저우] 아시안게임 육상 중장거리는 ‘아프리칸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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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광저우 아시안게임 육상 트랙 종목에 검은 돌풍이 거세다. 초콜릿색 피부에 곱슬머리의 아프리카인들이 나와 금메달을 휩쓸고 있다. 아시안게임인지 아프리칸게임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다.

 22일 남자 5000m 결승은 이들의 잔치였다. 바레인의 마흐붑 알리 하산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카타르의 제임스 콸리아와 제임스 키보레가 2, 3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들은 중동 출신이 아니다. 셋 다 케냐 태생으로 아프리카 선수들이 1~3위를 휩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23일 여자 1500m에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마리암 유수프 자말(바레인)도 원래 국적은 에티오피아다. 아시아인들의 잔치에 아프리카 선수들이 활개 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국적을 바꾸는 건 양측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해당 중동국 입장에서는 막대한 오일달러로 기량을 인정받은 아프리카 선수들을 귀화시켜 당장의 성적을 낼 수 있고, 선수들은 자국에서는 경쟁이 치열해 대표 선발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비싼 돈으로 유혹하는 손길을 외면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메달을 따주면 추가로 융숭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2004년 카타르로 귀화한 콸리아는 “카타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도 내가 뭘 바라는지 알 것이다”며 “1년에 카타르에 머무는 시간은 한 달도 안 된다. 케냐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중동 국가들이 오일 달러로 아프리카 육상 선수 사재기에 나서면서 중·장거리 판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만 해도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선수들이 1500m와 5000m·1만m를 석권했다. 그러나 2002년 부산 대회부터 아프리카 귀화 선수를 앞세운 중동 국가들이 시상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2006년 도하 대회에선 케냐 출신 선수들이 남자 800m와 1500m·5000m·1만m·3000m 장애물·마라톤 등 중장거리 금메달을 모두 가져갔다.

 이제는 단거리도 검은 돌풍이 불어닥칠 조짐이다. 이번 대회 남자 400m 금메달리스트 페미 오구노데(카타르)는 나이지리아 출신이며, 실격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남자 100m 아시아 기록(9초99) 보유자 사무엘 프랜시스(카타르) 역시 나이지리아 태생이다. 이들의 탄력은 토종 아시아인보다 월등하다.

 급기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무분별한 귀화를 막기 위해 ‘국적을 변경하면 3년간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을 두기에 이르렀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아프리카 청소년 유망주들에게 이미 오일달러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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