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 카드 발행 일시2024.06.19

〈제4부〉 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③돌아오지 않은 사람, 홍명희 (하) 

홍명희 가문의 ‘우울한 기억’ 

내가 관상을 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홍명희의 얼굴에는 그늘(수심·愁心)이 있다. 그의 고모, 곧 홍승목의 딸은 임시정부 내무부장과 재정부장을 지낸 애국지사 조완구(趙琬九)의 아내이니 그쪽 가문의 아픔은 또 어떠했을까? 아마도 홍명희의 수심은 바로 이러한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역사에 남을 천추(千秋) 열사였으나 아들을 먼저 보낸 할아버지는 다른 길을 갔으니 홍명희의 죄의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케임브리지 경제학자 마셜(Alfred Marshall)의 말처럼, 지식인들이 감내해야 할 ‘우울한 기억(hypochondria)’일 것이다.

소설가 홍명희(왼쪽)와 북한 김일성 주석이 뱃놀이를 하는 모습. 날짜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교수 제공

소설가 홍명희(왼쪽)와 북한 김일성 주석이 뱃놀이를 하는 모습. 날짜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교수 제공

홍명희의 명작 『임꺽정』의 ‘피장편(皮匠篇) 형제(兄弟)’에 보면, 임꺽정의 부모가 그를 낳고 백정의 아들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워 “걱정아, 걱정아”라고 부르던 것이 “꺽정”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괴산 지방에서는 꺽정이가 아주 못생긴 민물고기의 이름이다. 그가 주인공의 이름을 꺽정(걱정)이라 짓고 또 한자로 표기할 때는 왜 ‘林巨正’이라고 적었는지 그 뜻이 예사롭지 않다.

망국 직후에 중국으로 망명한 홍명희는 4년 동안 상해와 싱가포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말에 귀국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으로 귀향해 스스로 선언서를 짓고 의병대장 한봉수(韓鳳洙)와 상의해 이곳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한봉수는 음성·진천·괴산 일대에서 신화가 된 의병대장으로서 한민구(韓民求) 전 국방부 장관의 할아버지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가끔 그 어른이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특강을 하러 오셨는데, 우리는 그 용맹한 의병대장이라기에 마상의 이범석(李範奭)을 연상했는데, 강단에 오르신 할아버지는 한복을 단아하게 입고 몸집도 여리여리한 선비였다.

괴산 제월대 고산정의 추억

홍명희가 젊은 시절 망국의 아픔을 달랬던 충북 괴산 제월대의 고산정. 중앙포토

홍명희가 젊은 시절 망국의 아픔을 달랬던 충북 괴산 제월대의 고산정. 중앙포토

명나라 명필 주지번이 제월대에 남긴 편액 '호산승집(湖山勝集)'. 물과 산이 잘 어우러진 곳이라는 뜻이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명나라 명필 주지번이 제월대에 남긴 편액 '호산승집(湖山勝集)'. 물과 산이 잘 어우러진 곳이라는 뜻이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홍명희가 투옥되자 가족들은 5리 떨어진 제월리(霽月里)로 이사했다. 제월리는 가까운 느티울[槐江]에 제월대(霽月臺)라고 하는 험준한 절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본디 ‘제월’이라 함은 『송서(宋書)』 ‘주돈이전(周敦頤傳)’에서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해 그 모습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光風霽月)과 같도다’라고 감탄한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