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석굴암 비밀 왜 나와? ‘공사 변소 문짝’ 기막힌 반전

  • 카드 발행 일시2024.06.19

1907~1908년 “경주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는 말이 인근 일본인들에게 퍼져갔다. 이 말을 전한 게 우연히 그쪽을 들렀던 조선인 우편배달부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를 보고받은 경주의 일본인 우편국장은 당시 경주 군수와 일본인 부군수, 고적 전문가와 함께 토함산을 올라 폐허가 된 석굴을 발견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지 약 1200년 만에 석굴암이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어느 정도 아는 얘기다. 석굴암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다.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선 석불사(석굴암의 옛 이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 것들로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와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 등에서 석굴암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1912년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가 이곳을 방문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석굴암이 중수됐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부다.

“일반인은 잘 모르는데 1924년 일본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가 발굴·소개한 ‘석굴중수상동문(石窟重修上棟文)’이 있어요. 1891년 석굴을 중수할 때 그 내력을 적은 일종의 상량문이죠. 일본인에 의해 석굴암이 재발견되기 전에 원형이 어땠는지, 중수 당시 상태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석굴암 전실, 유리건판 사진, 1912년 11월~1913년 10월 이전 촬영. 사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석굴암 전실, 유리건판 사진, 1912년 11월~1913년 10월 이전 촬영. 사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동국대박물관 임영애 관장의 말이다. 석굴암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 ‘발견’됐고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단 얘기다. 1891년이라면 총독부의 중수 공사로부터 20여년 전이다. 게다가 상동문에 따르면 이 중수공사를 집행한 사람은 당시 세도가였던 풍양조씨 집안 출신의 경상도관찰사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잡풀과 폐허 속 석굴암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우리 손으로 보수 복원이 이뤄졌단 뜻이 된다.

이 상동문 목판 원본이 동국대박물관에 있다. 세간에 공개된 것은 2018년 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전단지향’ 전시 때가 유일하다. 실은 목판에 새긴 글씨가 오래돼 닳고 흐릿해져 맨눈으로 알아보기 힘들다. 언뜻 보면 그냥 넓적한 나무판대기 같다.

발견 당시에도 나무판대기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이를 매의 눈으로 골라 불쏘시개로 사라지지 않게 건져낸 이가 동국대박물관 초대 관장 황수영(1918~2011) 박사다. 1963년 9월 1일 개관한 동국대박물관은 국내 유일 불교종립대학의 종합박물관으로서 다채로운 유물과 함께 독보적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사라질 뻔한 석굴암의 중수 상동문 발견을 돌아보기 전에 먼저 일제 강점기 때 파란만장했던 석굴암의 사연부터 파헤쳐 보자.

석굴암 통째 서울로 옮기려한 조선총독부 

“엄명이었다. ‘불국사의 주조불과 석굴불 전체를 경성(옛 서울)으로 수송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즉각 운송 계산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경주 군수 등은 복종하는 태도였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야말로 폭명(暴命)이었다.(후략)”

대한제국의 관리로 경주에서 일했던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가 1924년 남긴 회고문의 일부다. 한마디로 석굴암을 뜯어서 불국사 불상과 함께 서울로 운송하라는 엄명이 있었단 거다. 기무라는 이 같은 명령이 1910년께 있었다고 회고한다. 한일강제병합이 있었던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