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으로 패한 여자럭비팀 표정이 밝았던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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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여자 7인제 럭비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현격한 실력차가 나는 중국에 고전분투했으나 완패한 뒤 경기장을 나가고 있다. 이영목 기자

지난 21일 광저우대학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중국의 아시안게임 여자 럭비 A조 예선은 한국의 51:0 완패로 끝났다. 그리고 22일 오후 1시, 태국과의 예선에서 여자 럭비팀은 48:0으로 또 한번 큰 점수차로 패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렇게 대한민국 여자럭비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럭비 대표팀이 꾸려진 것은 불과 6개월 전. 아시안 게임을 코 앞에 두고서다. 대한럭비협회는 3년전부터 여자럭비팀 창단을 구상중이었다. 2007년 여자럭비 클럽팀을 창단했지만 변변치 않은 훈련장과 지원 등이 발목을 잡았다. 여자럭비의 '꿈'은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대한럭비협회는 아시안 게임을 겨냥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시안게임 여자 럭비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한국 박소연(가운데)이 중국의 더블팀 수비를 뚫고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이영목 기자

지난 6월 5일, 여자 럭비팀의 첫 선발전이 치뤄졌다. 대한럭비협회에서 선발 조건으로 내건 것은 단 한가지 '대한민국 여성'. 그렇게 20명을 뽑는 선발전에 50여명이 참가했다. 많게는 30대 중반에서 적게는 10대 중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선발전으로 몰려들었다. '운동 좀 한다'는 여자들이 모이긴 했지만 이들 모두 '럭비'의 '럭'자도 모르는 사람들. 문영찬 감독은 선발 기준으로 기초체력에 가장 큰 중점을 뒀다. 100m 달리기, 400m 달리기, 사이드 스탭, 공 잡기, 공 피하기 등 스피드에 능하고 순발력이 좋은 선수들을 뽑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뽑힌 20여명의 선수들은 7월 1일 첫 공식 훈련을 가졌다. 그러나 3-4명의 선수를 제외하고는 럭비공을 만져본 적 조차 없는 '초보'들은 럭비공을 잡는 법부터 경기 룰까지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하지만 이같은 훈련도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 팀원의 대부분이 평범한 일반인인데다 팀이 급하게 꾸려지는 바람에 각자 하던 일을 채 정리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8월 말이 되어서야 합숙훈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부분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 라디오PD출신인 민경진(26)은 선발과 동시에 하던 일을 그만 두는 등 럭비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재 인천 가림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채성은(17)은 팀내 최연소이다. 그녀가 럭비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모님의 추천' 덕분이다. 채양의 부모는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한 럭비의 역동성에 반해 딸에게 이를 적극 추천했다. 채양 역시 그렇게 에너지 넘치는 럭비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럭비팀이지만 위기는 끊이지 않았다. 학교와 직장 등의 개인 사정으로 선수들이 하나둘씩 팀을 떠나기 시작했다. 결국엔 경기에 뛸 인원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됐다. 이에 문영찬 감독은 직접 선수발굴을 위해 나섰다. 문감독은 우연히 인천대학교를 방문했다가 창던지기 선수로 활동중인 김아가다(20)의 훈련모습을 보게 됐고 그 자리에서 즉시 스카웃했다. 그렇게 김아가다는 가장 마지막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 때가 바로 아시안 게임을 한달 앞둔 10월이었다.

대한럭비협회 사무국 관계자는 "창단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패기와 열정은 어느 팀 못지 않다"며 "51:0으로 패한 것에 대해 말이 많지만 우리는 '51점 밖에 안 먹었어?'라는 반응이다. 사실 100:0까지 생각했다. 그에 비해 51:0이면 아주 잘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뒤이어 "우리의 목표는 1승이다. 남들이 보기엔 소박한 꿈일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굉장히 큰 꿈"이라고 말하며 "꼭 이룰 수 있도록 많은 국민들이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시안 게임이 끝난 후 여자 럭비팀은 해산된다. 훈련계획이나 출전 계획도 없다. 모든 선수가 학교, 직장 등 6개월 전의 각자의 생활로 되돌아간다. 대한럭비협회 관계자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내년 3월 경 다시 한번 선발전을 치뤄 팀을 꾸려볼 예정이다"고 말했다. 뒤이어 "지금의 선수들이 또 한번 힘을 모아준다면 너무 좋겠지만 그것은 선수들 선택의 몫"이라며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유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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