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37개국과 수교 노태우 북방외교의 재발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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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01면

바야흐로 중국의 시대다. 한국에서 중국의 시대를 연 건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그해 8월 대만과 단교의 아픔을 무릅쓰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한국은 아시아 중심 세계질서에서 미아가 됐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중국 시장을 자유롭게 파고들 수 있는 환경은 저절로 마련되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가 그런 환경을 만들었다. 북방외교의 분수령은 90년 소련과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6·25 때 적대국이었던 소련·중국과의 잇따른 대담한 화해는 사회주의 몰락 후 불확실성에 빠졌던 한반도에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 2010년 한국의 번영은 북방외교를 생략하고 설명할 수 없다. 중앙SUNDAY는 이번 주부터 두 차례에 걸쳐 ‘북방외교의 재발견’ 기획기사를 싣는다. 북방외교의 대담성에서 오늘 한국 외교가 처한 딜레마를 풀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20년 전 한국 외교의 대담한 선택<上>

1990년 9월 6일 청와대 영빈관. 가을이었으나 하늘은 꾸물거렸다. 1차 남북고위급 회담 참석차 서울에 온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2005년 사망) 총리 일행이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했다. 노재봉 대통령비서실장,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배석했다. 노 대통령이 환영 인사를 건넨 뒤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그래, 부탁할 것은 없습니까.”

연형묵 총리=“임수경양을 풀어주십시오.”

임수경은 89년 동베를린을 거쳐 북한에 밀입국했다. 평양축전에 참가했으며 김일성을 만났다. 판문점을 통해 귀국한 뒤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죄로 수감됐다.

노 대통령=(환하게 웃으며) “그 아이는 그쪽에서 부탁하기 전에, 내 딸이오. 나한테 맡겨놓으시오.”

연 총리=“감사합니다.”

노 대통령=“다른 부탁은 없소?”

연 총리=(잠시 사이) “유엔 가입을 보류해주십시오.”

88년 남북 고위급 회담 제안 이후, 92년까지 남북한 총리는 일곱 차례 서울과 평양을 오갔다. 91년 말엔 남북관계 장전이라 불리는 ‘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소련과 중국, 동구 사회주의가 해체되면서 남북한에 엄습한 미증유의 불안이 한반도의 리더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했다. 불안의 먹구름 속에 북방외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노 대통령의 5년 재임(88년 2월~93년 2월) 동안 외교안보 참모로 활동한 김종휘 당시 외교안보수석의 회고.

“6공의 북방정책은 미수교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파티나 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아스피린 한 알씩만 팔아도 십수억 개가 팔리는 시장 아닙니까.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도 마찬가지예요. 경제적 요구도 있었지만, 기본 철학은 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것이었어요. 북한을 지원하는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김일성을 압박해 개방의 길로 이끌어내자는 것이었죠.”

그는 이어 “노 대통령은 21세기가 되기 전에 통일이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통일 한국에 유리한 국제 질서를 만드는 게 북방외교의 목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수석은 노태우 대통령의 이른바 북방외교 3단계론을 말한 것이다. 북방외교 3단계론이란 ①소련·중국 수교를 통한 대북 압박 ②한국 중심의 한반도 통일 ③시베리아(연해주)로 한민족 공동생활권의 확대를 뜻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민족통일로 가는 길을 열겠다”고 밝힌 이래 북방외교는 거침없었다.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퇴임 직전 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5년간 37개 공산권 국가와 새 장을 열었다. 18년간 90여 개국과 수교한 박정희 대통령을 능가했다.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 드라마엔 노재봉 총리, 최호중·이상옥 외무장관, 공로명 주 소련 영사처 대표, 김종휘 외교안보수석, 김종인 경제수석, 박철언 정무장관, 노창희 외무차관, 권병현 대중 실무교섭대표(당시 직책) 등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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