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이익 균형” 수차례 강조 … ‘자동차 일방 양보 않겠다’ 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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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재협상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말이다. 한국 정부가 협정문 수정은 없다고 공언해 왔지만 실제론 수정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전면적인 재협상이 아닌, 제한된 부분의 추가 협상”(최석영 FTA 교섭 대표)이라지만 본문이나 기존의 부속서 내용을 손질할 경우 협정문 재비준은 불가피하다. 현재 비준안은 우여곡절 끝에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통과한 상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내년 초 의회에 FTA 비준 동의안을 제출하겠다”는 공개 발언(6월)으로 촉발된 추가 협의가 반 년이 채 안 돼 새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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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커크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미국의 요구로 시작된 논의=미국의 한·미 FTA 논의 제안 이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가 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식 제안이 와야 논의의 틀이 잡힐 것”이란 입장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미국의 요구 수위는 예상보다 높았다.

통상장관 회의에 앞서 열린 수석대표 회의(8일) 전날에야 한국 정부에 전달된 미국의 공식 서류엔 자동차 분야의 핵심 조항인 관세 양허안을 다시 손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의 공식 발언 이후 론 커크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이 수시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드러냈다. 핵심은 쇠고기와 자동차였다. 오바마 대통령도 “현재 상태론 한·미 FTA를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미국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백악관은 17일(현지시간) 한·미 FTA가 타결되지 않은 데 대해 “그 협정이 우리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상(best)의 협정이 아니었기 때문”(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한국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2007년 협상과 닮은꼴?=2007년 FTA 체결 당시 가장 큰 어려움은 쌀이었다.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은 알려진 것과 달리 협상 마지막 일주일 내내 쌀 시장 개방을 거칠게 요구했다”고 했다. 한국 협상팀은 “ 국민 중 한 명도 협상을 깼다고 욕하지 않을 것”이라며 결렬을 각오하고 버텼다. 쇠고기와 자동차도 고비였다. 미국이 자동차 관세 양허안에 대해 뻣뻣한 태도로 일관하자 협상은 깨지기 직전까지 갔다. 이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쇠고기 수입과 관련, 국제수역사무국의 결정이 나오면 합리적 수준으로 합리적 시기에 처리하겠다”고 양보했다. 그제야 미국 협상팀은 현재의 자동차 관세 양허안(3000cc 이하 즉시 철폐, 3000cc 초과 3년 후 철폐)을 들고 나와 화답했다.

 이번 역시 비슷한 모양새다. 한국 정부엔 쌀 대신 쇠고기가 ‘불가침 영역’이 됐다. 미국은 서류 더미를 쌓아 놓고 쇠고기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통상장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긴급 관계장관 회의를 열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쇠고기는 논외”라며 버텼다. 대신 미국은 자동차 분야에서 상당 부분 양보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007년 당시 ‘주고받았던’ 쇠고기와 자동차의 관계에서 쇠고기를 얘기 못 하겠으면, 자동차라도 양보하라는 논리다.

 ◆이익의 균형점, 어딘가=최석영 대표는 “이익의 균형”을 여러 차례 얘기했다. 일방적인 양보는 없다는 거다. 최 대표는 “자동차에서도 주고받을 것이 있다”며 “다른 분야를 택하더라도 이익의 균형을 맞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애초 이번 재협상은 미국의 요구로 시작됐다. 양보하는 모양새를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자동차의 경우 FTA가 발효되면 한국은 8%의 관세를 즉시 폐지하지만 미국은 3000cc 이하에서만 그렇다.

 자동차 경쟁력 등을 빼고 협정문의 조건만 따졌을 때도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자동차에서 한국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5년 내 없애기로 돼 있는 미국의 타이어 관세를 즉시 없애거나 친환경차에 대해 확보한 10년의 국내 관세 철폐 기간을 연장하는 정도다.

 물론 자동차에서 양보하고 다른 분야에서 이익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섬유와 의약품·농산물 분야가 그런 분야다.

 섬유의 경우 기존 협정은 원사를 한국산으로 써야만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국내 섬유업체는 원사를 상당 부분 중국에서 들여오고 있으므로 이를 반영해 내용을 수정할 여지가 있다. 의약품과 관련해선 2007년 체결 당시부터 불리하다는 분석이 많았다. ‘허가-특허 연계조항’의 경우 오리지널 신약을 베낀 복제약품(제너릭)의 출시 시기가 2~5년 늦어지고, 허가를 위한 별도의 임상시험을 거쳐야 해 원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존 협정문에 명시된 유예 기간(18개월)을 더 늘리는 방안을 요구할 수 있다. 농산품 관련해선 세이프 가드 적용 범위 확대 등이 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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