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 살주계를 조직한 노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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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筆巖)서원에 보관된 노비안(奴婢案, 보물 제587-12호)의 겉표지와 본문. 조선시대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 지배층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종’이라는 관념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됐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1684년(숙종 10) 무렵, 서울의 청파(靑坡) 근처에는 살주계(殺主契)라는 조직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노비들이 모여 자신들의 주인을 죽이겠다며 만든 계였다. 계원 가운데는 당시 남인의 권세가였던 목래선(睦來善·1617~1704)의 노비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이 발각되자 목래선은 그를 잡아 죽였다. 포도청의 신문 기록에 따르면 살주계원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었고, ‘양반을 죽일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산을 탈취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그들은 또한 남대문과 언관(言官)들의 집에 “우리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는 너희들의 배에 칼을 꽂으리라”라고 쓴 방을 붙였다(정석종,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노비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극단적으로 저항했을까?

 노비제도의 유래는 오래됐다. 일부에서는 기자(箕子)가 전했다는 팔조법금(八條法禁)에서 ‘남의 재물을 도둑질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그 집 노비로 만든다’는 조문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노비는 사람이되 다른 사람의 ‘재물’이 되었고 가혹한 신역(身役)에 사역됐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세습되었다. 그 치욕과 고통이 오죽했으면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는가? 삼한에서 노비를 없앤다면 우리도 공경과 장상이 될 수 있다”며 노비들의 봉기를 선동했을까.

 노비제도가 확고했던 조선에서 노비들이 잠시나마 ‘신분해방’을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북쪽으로 파천했을 때, 조정에서는 군량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데 헌신한 노비들을 면천(免賤)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부 신료들은 “살아남은 뒤에야 노비도 부릴 수 있는 것이니 모든 노비가 면천된다 한들 무엇이 아깝겠느냐”며 맞장구를 쳤다. 나라가 망하고 자신들의 지배가 끝장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임기응변의 방책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도 조선의 노비제도가 너무 가혹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반들이 너무 많은 사람을 노비로 묶어두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군사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며 노비제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야무야됐다. 오히려 전쟁 이후에는 도망친 노비들을 추쇄(推刷)하는 조처가 강화됐다. 위기가 지나가자 ‘재산’을 확고히 지키려 했던 양반들에게 맞서 노비들의 저항도 더욱 거세어졌다. 숙종대 드러난 살주계는 그 가운데서도 상징적인 사례였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