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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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505호 여자 8

청년은 집으로 들어갈 때 휘파람을 불었다.
소녀는 선천적으로 귀가 밝았다. 특히 청년의 휘파람 소리만은 먼 데에서도 용하게 알아들었다. 청년은 소녀를 믿었고 소녀는 청년을 믿었다. 청년이 휘파람을 불며 올라오면 소녀는 창 앞으로 바투 다가서서 청년을 기다렸다. 창 너머로 머리를 내밀고 혀를 내밀며 메롱, 청년을 놀릴 때도 있었다. 청년은 그럼 빈주먹을 들었다 놓으면서 짐짓 화낸 표정을 했고, 소녀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톡톡 턱을 두들겼다.

턱을 두들기는 것은, 정말 화났느냐고 되묻는 그들만의 독특한 수화였다. 말이 없어도 그들은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소녀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가 두 손 합장해 귀에 대면 아버지가 잠들어 있다는 소리였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두 눈에 대 보이면 아버지가 깨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소녀의 아버지 때문에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신호는 나날이 늘어났다. 심지어 네 집의 은행나무는 수놈이어서 열매가 안 맺는 거야, 라는 말도 청년은 손짓발짓으로 할 수 있었다. 소녀는 그의 이상한 몸짓이 하는 말을 신기하게도 거의 다 알아들었다.

그 무렵 소녀의 아버지는 매일 동사무소, 구청으로 나들이를 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맹인이었지만 보통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힘차게 거리를 걸어 다녔다. 동사무소, 구청에 들러서 무허가 집을 철거시키라고 반복해 민원을 제기했다. 구청에 들어가 무허가 개장수 집을 왜 계속 방치하느냐고 소리를 질러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개 냄새가 밴 청년을 끔찍이 혐오했다.

철거를 종용하려고 집으로 찾아오는 구청직원의 발걸음이 잦아진 것은 전적으로 소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청년의 아버지는 개의 목을 따는 칼을 들고, 철거를 하라고 찾아온 구청직원에게 동네의 모든 집들이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내 집이 여기에 있었다.’라고, 늙은 개처럼 짖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특수부대를 강인하게 키워낸 것도 알고 보면 당신의 개고기 때문이었다고, 청년의 아버지는 소리쳐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동네가 형성되고도 청년의 아버지는 여전히 개를 키우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예전과 달리 개들이 짖는 소리를 낼 수 없게 됐다는 것뿐이었다. 개들은 좁은 철창 속에서 하루 종일 침묵했다. 아버지가 길고 가는 쇠꼬챙이로 모든 개들의 고막을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귓구멍을 찢으면 벙어리가 되거든.” 청년의 아버지는 설명했고 “벙어리는 말을 못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덧붙였다.

보통사람보다 기골이 장대한 편인 청년의 아버지는 언제나 표정이 전혀 없었다. 고막이 찢긴 개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막을 찢긴 개들은 목이 졸려 죽어갈 때조차 고요했다. 개들의 귓구멍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개들의 귓구멍을 찢은 쇠꼬챙이는 늘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청년의 아버지는 때로 그 쇠꼬챙이로 등까지 긁으면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곤 했다. 개의 목에 올가미를 걸거나 배를 가를 때에도 하품하는 아버지를 청년은 자주 볼 수 있었다. 권태로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청년은 아버지와 달리 헌칠하고 준수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의 곧고 맑은 눈빛과 마주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호의에 찬 미소를 날렸다. 그러나 청년이 ‘개장수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접하면 고개를 외로 꼬고 연민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이내 혀를 찼다. 청년의 눈빛을 생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소녀밖에 없었다. 소녀는 잘 웃었다. 청년은 원래 웃을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소녀를 만나고 나서 청년에게도 조금씩 웃는 기술이 생겼다. 웃음을 배운 적 없었으므로 청년은 스스로 웃음을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소녀가 웃으면 청년도 즉각 따라 웃었다. 왜 웃는지 모르고 웃을 때도 많았다. 소녀의 웃음은 언제나 고요하고 해맑았다.

울타리 밖의 청년과 창 안쪽의 소녀가 서로 바라보면서, 소녀의 아버지에게 들킬까 보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웃기만 하다가 헤어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웃음이라는 말은 엄지와 검지손가락 끝을 빠르게 뗐다 붙였다 뗐다 붙였다, 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소녀의 고안이었다. 나중엔 소녀가 손가락 두 개를 뗐다 붙였다 하기를 시작만 하면 청년은 마치 자동인형처럼, 즉각 웃게 되었다.
소녀가 처음으로 운 것은 은행을 선물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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