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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콘’과 뒹군 지 10년 됐네요, 크게 웃으며 떠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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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99년 출범한 ‘개그 콘서트’는 공개 코미디 프로로는 드물게 11년째 장수 중이다. 지난해 500회를 맞아 모인 출연자·제작진들. 정가운데 하늘색 티셔츠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이가 김석현 PD다. [KBS 제공]

웃음이 요리라면, 이 남자는 국내 최고 주방을 부렸다. 참신한 요리사를 제때 발탁했고, 신선한 재료로 제철 음식을 차려냈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최강자 ‘개그 콘서트’(이하 ‘개콘’) 김석현(39) PD다. ‘김탁구’ 뺨치는 후각과 미각으로 메뉴 트렌드를 선도하니, 일대 요리집(SBS ‘웃찾사’, MBC ‘하땅사’)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최후의 만찬’을 차리는 날이다.

 김 PD가 17일 녹화를 끝으로 ‘개콘’을 떠난다. 2000년 조연출로 첫 인연을 맺은 이래 PD 생활 대부분을 ‘개콘’ 연출로 보냈다. “어느 날 보니 ‘개콘’ 방청객 연령층이 수년 전보다 높아졌더라고요. 제가 만드는 웃음이 요즘 세대와 통하고 있나 돌아보고 ‘이제는 떠날 때다’고 생각했어요.”

 2004년 심현섭·강성범 등 대표 주자가 줄줄이 탈퇴한 이른바 ‘개콘 파동’ 때 지휘봉을 잡은 지 6년 만이다. 코너·연기자 간 경쟁체제를 도입해 시청률 30%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 9월 10주년을 맞아 인기 코너를 조사했을 때, 50위권 안에 그가 부임해 만들었던 코너가 47개나 됐다.

 ◆만인의 관점에서 봐야=그가 생각하는 코미디의 기본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시청자들을 가르치려는 느낌은 안 돼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하고픈 얘기를 대신 해주는구나 싶어야 웃음이 나와요.” 대신 사람마다 공감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10여 개 코너를 다채롭게 구성한다. 3대 가족이 모여 시청해도 각자가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소재를 배치하는 것이다.

 공개녹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주조정실에서 즉석에서 편집을 진행한다. 그만큼 상황이 치밀하게 짜여 있고, 방송으로 나갔을 때 어떤 반응이 올까 감이 빠른 것이다. “현장에서 왁자하고 터졌다고 해서 방송에서도 재미있을 거란 건 오산이죠. 잘 짜인 상황을 흐름대로 편집하는 게 원칙이에요. 그런 점에서 요즘 리얼 버라이어티를 보면 아쉬운 생각이 들어요. 상황을 벌여놓고 어떻게 노나 지켜보다 나중에 자막과 편집으로 보완하니까요.”

 ◆코미디 같은 세상=김 PD는 연출자인 동시에 기획자다. 지난해 최고 화제작이었던 ‘분장실의 강선생님’도 “여자들끼리 독한 분장하고 웃기는 코너를 짜보라”고 한 그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웃음충전소’에서 여자들 험한 분장 시킨 코너가 있는데, 저질이라고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분장실이라는 설정을 넣었더니 그런 얘기가 쑥 들어갔죠.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듯, 웃음 포인트도 살짝 비틀면 돼요.”

 성차별·종교·정치 등 ‘개콘’이 건드리는 지뢰밭은 허다하다. 관련 단체·직업군도 격하게 반응한다. 최근 난감했던 경우로는 한선교 국회의원이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을 거론했을 때를 꼽았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문제 삼았는데, 그 말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본 격이죠. 더 큰 문제는 그 코너가 약효가 다 해서 내리려는 차였거든요. 외압 폐지 소리가 나올까 싶어 5주나 억지 연장했어요.”

 ◆시트콤 연출이 꿈=김 PD가 최고로 꼽는 웃음은 ‘김병욱표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부터 빼놓지 않고 봤다”며 열혈 팬을 자처한다. “웃음은 완급이 중요한데, 김병욱 시트콤은 한번을 터뜨리기 위해 꾹꾹 눌러가며 복선을 깔아놓는 게 보여요. 한때는 나도 저 정도는 만들 수 있다, 생각했는데, ‘거침 없이 하이킥’과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니 어림없겠더라고요.”

 지난 3일 녹화현장에 김병욱 PD가 찾아와 ‘깜짝 만남’이 이뤄졌다. 둘 다 “나서서 웃기기보다 사람을 가리는 편, 한 가지를 봐도 스토리텔링을 구상하는 편”이라며 통하는 게 많았다. “시트콤 자질이 충분하니 2~3년 내 도전해라”는 김병욱 PD의 덕담에 김석현 PD가 답했다. “저 2등은 하기 싫어요. 김병욱 PD가 은퇴할 때까지 기다릴래요.”

 ‘개콘’ 후속으로 맡은 것은 퀴즈쇼 ‘1대100’ 공동연출. 조만간 구상 중인 메뉴는 ‘개콘’ 개그맨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버라이어티쇼다. “공개 코미디가 리얼 버라이어티의 입문 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창적인 장르란 걸 입증하겠다”는 게 떠나는 ‘웃음 셰프’의 변이다. 마지막 녹화분은 21일 방송된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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