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G20 이후의 세상, 정치가 걱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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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큰 잔치가 끝난 이쯤에서 천하대세를 다시 짚어보아야겠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로 넘어온 지난 한 세대의 세계사는 한마디로 ‘세계화의 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시장의 세계화는 물론 사회·정보·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인식과 구조가 국경을 넘어 세계화 또는 지구화되었다. 이러한 세기적 변화는 대다수의 국가에서 대중을 가장 중요한 권력자원으로 부상시켰으며 기존의 국가체제나 국제기구가 과연 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지 역사적 시험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지난 2년여의 국제 금융위기와 이에 대처하는 G20 정상회의 출범과 활동도 바로 그러한 세계화의 진전과 진통이란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의 세계화가 지구촌 곳곳에서 고도성장을 촉발하고 빈곤 감축에 크게 공헌한 것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경제성장이 계층 간,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오히려 증대시켰다는 비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인도처럼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기록하는 국가에서도 빈부 격차는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전통적인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격차에 더하여 BRICs로 불리는 신흥경제대국과 최빈국들 사이의 격차도 계속 넓어지고 있다. 이를 볼 때 지구촌을 빈부 격차의 문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세계화’를 넘어선 보다 넓은 시야에서의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하겠다.

 금융자본시장의 세계화는 지난 13년 동안에 두 번의 큰 경제위기를 초래하였다. 1997~99년의 외환위기는 아시아 시장에서 촉발됐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7년에 시작된 작금의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의 본산인 뉴욕의 월가(Wall St.)에서 비롯되었다.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지구촌 전체를 금융대란이란 전염병 감염지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G20과 같은 공동 대처가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며 지난주 서울 정상회의에서의 성과도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공동대처 방안이 성공하려면 필수적으로 개별 국가들의 확실한 의지와 집행능력이 요구된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주요 국가의 정치가 지구촌의 공동운명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바탕으로 운영돼야만 할 것이다. 위기의 성격은 경제 문제이지만 해결책의 실마리와 추진은 결국 정치적 결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시대의 지구촌이 굳건한 협력체제로 나아가기 위하여 함께 대처할 과제로는 경제 문제뿐 아니라 자연환경의 보전,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 특히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공동체를 파괴하는 비인간화의 흐름을 어떻게 차단하느냐는 인간 안보를 꼽을 수 있다. 인간보전, 자연보전, 사회보전의 3박자가 모든 국가의 궁극적 정치목표로 정착될 때에 비로소 평화롭게 번영하는 지구촌의 앞날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여러 나라의 정치체제와 지도자들이 과연 그러한 역사적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앞서 지적한 대로 정보와 의식의 세계화는 대중을 중요한 권력자원으로 부상시켰다. 이에 더하여 중산층의 확대는 민의(民意)가 체제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을 촉진시킴으로써 기존의 권력층을 긴장시키고 정치개혁을 모색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오늘의 중국도 예외일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미국·프랑스·일본을 비롯한 민주주의 체제들도 오늘의 경제위기 속에서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불황이 수반하는 고통의 분담이 불공평하다는 인식이 파급될수록 현존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과 반발은 확산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국민을 돕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조치를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집권층에 대한 강한 반대를 부르짖는 대중의 일견 모순된 입장은 바로 국가의 능률적 운영에 필요한 구심력을 상쇄하여 버리는 원심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선진민주정치의 시련은 단순한 소통의 실패보다는 구조적 결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정치의 경우 경제위기에 못지않게 정치위기의 본질을 진단하는 기초작업조차도 거부하거나 외면하면서 혼미와 불안정을 지속시키고 있다.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이 반영하는 공동체의 미래를 누가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공론에서 정치는 멀어져 가고 있는 인상이다. 경제 대공황의 위협에 정신을 바짝 차린 세계 각국은 저마다 국가체제와 전략의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 한마디로 계층 간, 국가 간의 균형을 재정비하는 정치적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바빠 보이는 우리 정치권도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작업을 서둘러야 되지 않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