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 생각이 일어날 땐 그대로 있어라, 고요히 물러가도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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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호 08면

놀라겠지만 유학은 도덕(道德)을 고취하지 않는다. 즉 “공자왈” 등으로 사람을 압박하거나 자잘한 에티켓에 목매지 않는다. 선(善)은 외적 규범이나 강제가 아니라 흡사 뿌리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자라는 것처럼, 인간 ‘고유(固有)’의 성장이고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인데, 이 무위(無爲)가 바로 ‘도덕(道德)’의 원래 의미였다. 『노자』를 『도덕경』이라 부르는 것은 익히 알 터이다. 도(道)는 여기 우주적 과정을 가리키고, 덕(德)은 개별 사물들이 분유한 우주적 공능과 참여를 가리켰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옛적 용어들은 현대적 서구 번안어로 채용되면서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잃고 거의 황야로 내몰렸다. 옛 지혜에 이르자면 그 지점부터 자세히 살피고 또 살피는 고고학적 탐사를 거쳐야 한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9>-정심(正心), 마음을 세탁하는 법

1. 기대도 희망도 없이
이상적인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 먼지 없는 잘 닦인 거울처럼 깨끗하고, 물결 없는 시내처럼 고요하다. 이 안에는 선한 의도(著意)나 행위에의 강박(按排)이 없다. 그 ‘빈자리’에서 사물들은 생긴 대로 놀고, 나 또한 본래 ‘예비된 자연(性)’을 표출할 것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이처럼 “무(無)로부터 솟아나와야 한다(從無處發出)!” 이 점에서 유교, 특히 주자학은 노장 불교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대체 마음속에 어떤 찌끼가 살고 있을까. 수도 없지만 주자는 세 가지 범주를 들었다. 1)‘기대(期待之心)’가 있다. 육조 혜능이 『금강경구결(金剛經口訣)』에서 ‘희망심(希望心)’이라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낙관에서부터, 특정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취득적 동기가 여기 포함된다. 이것이 첫 번째 잡동사니(?)다. 2)다음에 일이 끝난 다음에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다. 불교는 이를 훈습(薰習)이고 종자(種子)라 부르는데, 다음의 생각과 행동은 이 ‘과거’로부터 연변(演變) 이숙(異熟)될 것이다. 일은 ‘그 자리에서’ 태워야 할 일이지,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주자학은 도덕적 행동은 물론, 후회나 자책조차 너무 오래, 깊이 해서는 안 된다(罪己責躬不可無, 然亦不當長留在心胸爲悔)고 했다. 이는 즉 ‘현재에, 사태와 더불어 머물라’는 권고다. “첫걸음을 디딜 때는 첫걸음에, 두 번째 걸음에는 두 번째 걸음, 그곳에 의식의 전부가 집중되고 깨어있어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오직 ‘하나’에 집중할 뿐, 어디 다른데 콩 밭에 가 있지 말라! 이 노력을 경(敬) 혹은 거경(居敬)이라 부른다. 이 훈련의 깊이는 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은 심지(心志)가 든든치 못한 탓이다. 착한 일이 꿈에 보이는 것도 권할 일이 아니다. 그 또한 마음이 어딘가에 붙들려 있는 탓 아닌가. 일의 전조나 예기처럼 오는 ‘신비’ 외에는 다 마음의 군더더기라는 것이다.

2. 마음속 편견과 편향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잡동사니로 3)‘편견’과 ‘편향’이 있다. 『대학』은 ‘정심(正心)장에서 말한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다면, 공포가 있다면, 특정한 선호가 있다면, 혹은 걱정에 쌓여 있다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미리 점유되어 있다면 사물을 인지할 수 없음은 물론, 거기 적절히 반응할 수 없다. 다시 『대학』은 말한다. “마음이 (다른 것에 점유되어) ‘현재’를 놓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른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역시 마음은 “완전히 비워야(心不可有一事)”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마음속의 찌끼 가운데 율곡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있다. 4)바로 ‘뜬 생각(浮念)’이다.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벌떼 같은 상념들. 율곡은 차라리 ‘악념(惡念)’은 다루기 쉽다고 말한다. 도덕적 갈등이 자각을 불러 일으키고 제어의 브레이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뜬 생각들은 선도 악도 아닌 모호한 성격으로 하여 실제로는 도(道)에 가장 위협적이라고 했다. 이들 “부념은 별 일이 없을 때, 문득 일어나고 사라져서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한다.(惟)” “비록 착한 생각이라도 적절한 때가 아닌 것은 부념(或雖善念, 而非其時者, 則此是浮念也)”이다.

3. 뜬 생각을 다스리는 법
율곡은 이 생각을 그러나 ‘눌러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천만 경계한다. 이 점에서 지눌이 『수심결(修心訣)』에서 준 처방과 다르지 않다. “부념이 일어날 때 이를 혐오하면 더욱 더 분란이 일어납니다. 혐오하는 이 마음이 또한 부념임을 잊지 마십시오. 부념임을 ‘캐치’한 후에는 그것이 가볍게 물러가도록 두십시오. 단지 마음의 각성을 일으켜, 부념에 휘둘리지 않으면, 일어났던 마음이 곧 그칠 것입니다. (다만 절대로 여기 끌려다녀서는 안됩니다.) 이런 노력을 날마다 쉬지 않고 하시되, 하루아침에 효과를 볼 생각을 마시고, 작파해서도 안됩니다.

기량이 자리 잡히기까지는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바탕을 청소하여, 마음속에 ‘한 생각’도 없게 해서, 청화한 기상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 오랜 훈련이 중심을 잡으면 이 마음이 우뚝 튼튼히 서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 더 이상 사물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 속한 것이 자신의 뜻대로’ 발휘되고, 내 속 본체(本體)의 밝음이 가려지지 않고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밝은 렌즈에 사물의 실제가 어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久久純熟, 至於凝定, 則常覺此心卓然有立, 不爲事物所牽累, 由我所使, 無不如志, 而本體之明, 無所掩蔽, 睿智所照, 權度不差矣)”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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