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힘 넘치는 데생, 거침없는 표현 … 그는 모든 터부에 도전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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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호 04면

1 에곤 실레의 모습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찬찬히 바라보며, 어둑한 곳에서 입에 물을 머금고 하늘이 내려준 천연의 공기를 마시며 이끼 낀 나무를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자작나무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며, 푸른빛과 초록빛에 물든 계곡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다.”(에곤 실레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 안톤 페치카에게 쓴 편지의 일부. 최도성의『일생에 한번은 동유럽을 만나라』 중)

김성희의 유럽문화통신 : 탄생 120주년 맞아 유럽에 부는 에곤 실레 바람

프라하에서 버스로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체스키 크롬로프(Český Krumlov)는 체코 남부 보헤미아 지방에 흐르는 블타바 강(체코어로 Vltava, 독일어로는 몰다우(Moldau)
)을 낀 중세도시다.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촉촉함이 느껴지는 수채화와도 같은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을 꼭 방문해야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도, 프라하 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이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뮤지엄이 있고 이곳에서 그의 전시(4월 17일~10월 31일)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에곤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1890년에 태어나 2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고 갔다. 그의 생김새나 활동한 시대, 혹은 그림의 우울한 느낌 때문인지 체코의 문학가 프란츠 카프카와 연관 지어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거침없는 표현과 정직성, 직감력, 그리고 천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림의 음울함, 신경질적 표현, 의도적인 신체의 절단, 치부의 노골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이 보는 이에게 왠지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터부로 삼는,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리라.

쌀쌀한 바람이 마을을 둘러싼 자작나무 숲을 지나 중세의 마을을 걷고 있는 여행자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고요한 호수처럼 맑았던 하늘이 회색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에곤 실레 아트 센트룸(Egon Schiele Art Centrum)으로 향해 가면서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쓸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지울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곤 실레가 체스키 크롬로프에서 잠시나마 거주했던 것은 이곳이 그의 어머니 마리에 실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실레는 연인 발리 노이첼과 함께 살며 마을을 거닐었고,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많은 집들을 화폭에 옮겼다. 하지만 그의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그림을 받아들이지 못한 보수적인 체스키 크롬로프의 주민들은 그림에 욕을 퍼붓고 마을에서 쫓아냈다. 그런 곳에 지금은 그의 그림을 소장한 아트 센터가 있다니, 심기가 불편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 39자화상39(1912), 유화와 무광 페인트, 32.4*40.2㎝3 에곤 실레 아트 센트룸 전경4 에곤 실레가 사용했던 가구들과 거울 사진 에곤 실레 아트센트룸 제공

1608년에 지어진 맥주공장을 개조해 만든 에곤 실레 뮤지엄은 블타바 강 어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 길게 붙은 포스터와 길가에 세워져 있는 나무간판은 올해가 에곤 실레 탄생 120주년임을 알려줬다. 2층으로 올라가니 에곤 실레의 작품들과 그가 사용한 가구가 전시된 방이 나왔다. 그가 그린 체스키 크롬로프의 풍경화들과 자화상, 인물상 등 40여 점의 작품과 그의 흑백 사진들이 있었다. 입구 바로 왼편에는 그의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그가 그린 인물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의상이 재현되어 설치돼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에곤 실레가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를 비춰보던 검은 테두리의 거울이 걸려있었다.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애장품이다. 거울 주변에는 에곤 실레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하는 침대와 테이블, 의자들도 있었는데 모두 검은 색이었다. 그의 우울한 성격의 한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이 세상에서 데려간 것은 바로 스페인 독감이었다. 그는 아내 발리가 사망한 지 사흘 만인 10월 31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에곤 실레는 인물 드로잉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지우개를 거의 쓰지 않으면서 단시간에 형태를 그렸고, 표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는 뼈와 가죽만 남은 삐쩍 마른 초상, 붉은 색으로 표현된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성적 욕구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남성과 여성의 음모는 물론 성기도 아무런 주저없이 적나라하게 그렸다. 실레 이전에는 그 어떤 화가도 인간의 치부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에곤 실레가 신체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당시 함께 친하게 활동하던 다른 아티스트들과 보디 드로잉을 연습하면서부터다. 에곤 실레는 이 연습을 통해 지그문트 프로이트처럼 인간의 깊은 영혼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에곤 실레는 스승의 비잔틴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들은 전보다 대담하고 비범하지만 신경질적이고 즉흥적으로 변했다.

에곤 실레의 그림들은 동양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 낙관처럼 보이는 네모난 사인과 위치, 여백의 미, 소박한 재료의 사용 등이 그렇다. 탄탄한 선을 사용해 간결하게 그린 초상화들은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이상화한 것이다. 에곤 실레는 세상에 3000여 점의 드로잉과 300여 점의 회화를 남겼다. 그는 스스로가 유명해 질 것을 알았고 최대한 많은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가 죽기 전에 그린 그림들은 넉넉하고 덜 즉흥적이며 전과 다르게 모든 신체의 부분이 묘사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1917년에 그린 누워 있는 여인의 그림은 전의 그림들과 달리 풍부하고 따뜻한 느낌마저 든다.

에곤 실레의 탄생 120주년 기념 전시회는 올해 2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밀라노의 팔라초 레알레에서도 열렸다. 비엔나의 레오폴드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40여 점과 클림트, 코코슈카, 모저,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 당시 빈 분리파(Wien Sezession) 오스트리아 화가들의 그림들이 대거 전시됐었다. 에곤 실레 이전 화가들의 그림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화 및 많은 드로잉이 소개됐다. 에곤 실레 초창기의 드로잉은 이들과 매우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컨셉트 측면에서 보면 이들도 다른 동시대 화가들처럼 자신과 주변의 사생활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신체를 주제로 삼아 그림으로 그려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화가들의 개인주의와 사회성 결여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신체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순수한 미술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강한 자아의 표현과 행동의 심리적 무게를 표현한 자기 반성의 방법이었고 에곤 실레가 이들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은 스위스 바젤의 바이엘러 미술관에서 내년 1월 16일까지 열리는 ‘비엔나 1900’전에서도 즐길 수 있다. sunghee@stella- 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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