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Special]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 광주광역시 서구 구의원 해보니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광주광역시 서구의회 소속 이병완 의원.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에는 20평가량의 집무실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책상 하나가 전부다.


‘구(區)의원’이 된 청와대 비서실장. 극과 극의 변신이다. 대통령 옆에 찰싹 붙어 300조원 나라 살림을 걱정하던 남자, 이젠 ‘구청 주부 합창단’의 간식비 문제로 머리를 쥐어짠다. 명색이 의원이지만 자기 방 하나 없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대통령 비서실장 경력이면 ‘오라는 곳’도 있었을 터다. 그는 왜 ‘0.5평’짜리 칸막이 공간에 둥지를 틀었을까. 의원 배지를 달았던 지난 4개월이 그는 “충격 그 자체였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치와 행정의 모세혈관 같은 구의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야 생생히 목격했어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옆에서 일한 뒤, 지난 6월 지방선거의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어렵게(?) 당선된 이병완(56)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봤다.

글=김준술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구의회 의사당에 앉은 이병완 의원. 연장자 예우로 맨 뒷자리를 배정받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 요즘 의정활동에 고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2015년 광주에서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열어요. 제 ‘지역구’인 화정동 아파트를 헐고 선수촌을 짓기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4월에 경제효과가 떨어지고 나중에 시설 관리도 힘들다고 반대했거든요. 주민투표로 개최권을 반납하자고 했죠. 그런데 두 달 뒤 거기서 구의원 출마를 한 겁니다. 하하. 나중에 결과를 보니 그 동네에서 표가 많이 안 나왔어요. 거주 주민이 2만 명, 4000가구인데…. 이런 문제에서 주민들 얘기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 의견은 어떻게 듣습니까.

“주민들이 ‘비서실장까지 했으니 시와 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빅 마우스 역할을 해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슈가 생기면 토론회 같은데 저를 초청해 얘기를 듣고자 해요. 또 주민자치위원회라는 게 있죠. 동네마다 20여 명씩 모여 매달 현안을 토론하고 그래요. 기자님도 이런 게 있는 줄 모르셨죠? 대개 그럽디다, 하하. 10월 초에 지역구인 풍암동 회의에 참석했죠. 동네 축제가 화두였어요. 단풍 축제에서 노래·장기 자랑을 어떻게 하고, 후원은 어떻게 마련하고….”

● 주민들 요구사항도 많을 텐데요.

“구 예산이 2200억원 정도인데, 재정자립도가 30% 안팎이에요. 돈 쓰는 문제가 참 열악합디다. 지난 9월에 ‘추경예산’ 80억원을 심의할 때였어요. 나누다 보면 몇백만원 단위로 쪼개집니다. 서구청 산하에 청원경찰이 몇십 명 있어요. 이분들이 체육대회를 하는데 운동복 지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어요. ‘지난해에도 지급했는데 그거 쓰면 되지 뭘 또 주냐’ 이런 주장과 ‘그래도 1년에 한 번인데 해주자’는 쪽이 맞서는 거죠.

●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런데 정말 진짜 판단이 안 됩니다. 이게 뭐가 문제일까. 어떤 잣대로 판단해야 할까. 청원경찰 체육복만 해도 격려 차원에서 필요하지 않냐는 ‘정(情)’ 차원의 접근법이 있겠죠. 그러나 구청장이 음료수 지원 같은 것을 하면 되지, 뭘 또 체육복을 지급하냐는 시각이 있을 겁니다. 둘 사이에서 판단 하기가 쉽지 않고, 너무 낯설어요.”

● 그런 데서 뭘 배웠습니까.

“다짐했죠.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자. 인턴 구의원이라는 생각으로, 초보 의원이라는 생각으로요. 아, 이런 문제도 있구나. 정말 모세혈관에서 이렇게 얽혀 있구나 생각해요. 구의회는 큰 국정(國政)에서 ‘마지막 모세혈관’이죠. 300조원 국가 예산이 강을 타고 실개천을 타고 이렇게 흘러 오고,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큰 고민 없이 여겼던 문제를 새삼스럽게 들여다보게 된 겁니다.”

● 체육복 논란 같은 일이 많나 보죠.

“여기에 주부 합창단이 있어요. 그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하고 그러는데 간식비로 지금까지 연간 200만원을 줬는데, 400만원으로 올리자는 안건이 있었어요. 이때도 ‘밥 먹는데 비싼 거 먹을 필요 있냐, 절반으로 깎자’ 이런 얘기가 나왔죠. 물론 다른쪽에선 ‘TV프로 남자의 자격에서 박칼린 음악감독이 히트치면서 합창단이 인기인데 지원해 줘야 되는 것 아니냐’며 찬성 목소리를 높였지요. 결국 100만원 삭감해 300만원으로 하는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 청와대에선 그런 대립되는 ‘국정 현안’을 어떻게 풀어갑니까.

“사실 액수로 보면 청원경찰 체육복 지원액은 모두 80만원이에요. 웬만한 삽겹살 회식만 해도 돈이 꽤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적은 돈이라도 마지막 세포에 전달되는 모세혈관의 성격이 있다면, 더 성의 있게 따져봐야겠구나 생각했죠. 원래 청와대에선 ‘큰 원칙과 대의, 그리고 여론’이란 세 가지 방향에서 일을 해왔죠. 그런데 구 의회 안건은 누구라도 쉽게 판단하기 힘들어요. 현장의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데 주력해야 하는 이유죠.”

● 주민 기대처럼 ‘빅 마우스’ 역할은 잘 합니까.

“만나는 분들마다 ‘자주 좀 돌아다니라’고 해요. 전화하는 분도 많고요. 얼마 전엔 북구 사시는 개인택시 기사가 ‘왜 가로등이 그렇게 높냐, 낮추면 조도가 밝아지고, 돈도 덜 들고, 범죄도 막을 텐데’ 하더라고요. ‘이런 건 실장님이 시에 얘기해야 한다’면서요. 얘기 된다 싶어서 법이 어떻게 돼 있나 알아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시장 만나서 호통 좀 쳐달라’는 주민도 있어요. 저는 “구의원이 그렇게 못 한다”며 정중히 얘기합니다.”

● 구의원 출마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어려운 결심은 아니었죠. 청와대 있을 때부터 참모, 수석들과 ‘물러나면 뭘 할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모두 저더러 ‘국회의원 출마하셔야죠’ 했지요. 그때마다 저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게 ‘기초의원 나가보면 어떨까’ 답했죠. 2008년 5월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간 뒤 찾아뵈었죠. 대통령이 그러더라고요. ‘이거 농반 진반인데, 내가 김해시의원 나오면 어떨까, 이 실장.’ 저는 ‘떨어지면 어떡하느냐’고 반대했죠. 사실 김해 전체로 보면 노 전 대통령은 인기가 없었어요. 대통령을 배출했는데 별로 시혜 입은 게 없다는 불만 때문이었죠. 땅값만 올랐다고들 하고. 아무튼 노 전 대통령이 제 고향도 묻더니 ‘이 실장도 (기초의원 출마를) 한번 생각해 보시오’ 했어요. 그 뒤로 ‘참여’라는 가치를 실천해 보고 싶어 결국 이번 출마를 결심했죠.”

● 일종의 ‘생활정치’ 같은 겁니까.

“국민참여당 강령에 ‘노무현 정신을 정치적으로 구현한다’는 게 있어요. 참여정치는 생활정치고, 기본은 주민자치 아니겠어요. 미국에서 1930년대에 공화당 전당대회부터 ‘풀뿌리 민주주의’란 용어가 나왔어요. 정작 자기 동네, 마을 일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이런 틀이 안 갖춰졌다는 반성이 있었지요. 우리도 똑같다고 봅니다. 자기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죠. 제가 구의원으로 나선 이유이기도 하고요.”

● 서구 구의원에 한나라당 소속이 없는데 ‘견제와 균형’의 톱니바퀴가 작동합니까.

“13명 의원의 소속이 대개 민주당·민주노동당이고 제가 국민참여당이죠. 여기선 민주당이 여당으로 통해요. 한나라당은 아예 출마 자체를 안 하는 분위기죠. 그러나 동네 일을 하는데 사실 당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구의원 뽑는 것은 정당을 통하지 않은 시민공천제 같은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디다.”

● 월급도 없는데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의정비가 나옵니다. 월 250만원, 연 3000만원 정도 돼요. 서구는 작년, 재작년 모두 동결됐죠. 이번에 올리자고 하는데 행정안전부 고시를 적용하면 10% 올라가게 돼요. 너무 높다는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제 젊은 친구들, 전문직 인사들도 구의원에 많이 뛰어들어야 해요. 그러려면 어느 정도 의정비가 필요한데 무작정 올릴 수도 없고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 앞으로의 목표는 뭡니까.

“동네 목욕탕 자주 갑니다. 언론사 근무 때 마감 끝나고 가던 습관이 있어서…. 아무튼 목욕탕에서 주민들 만나면 ‘앞으로 시의원 하고, 구청장 하고, 시장도 도전해 보시고’ 이럽니다. 계산해 보니 한 16년은 걸리겠더라고요, 제 나이도 있는데, 하하. 제가 국민참여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고 지금 참여정책연구원 이사장인데, 구의원 외에 2012년 대선을 위한 전략적 검토를 해보고 싶어요. 저는 대선과 관련해 우리 선거 구도가 ‘물리적 변화’에서 ‘화학적 변화’의 시대로 가고 있다는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어요.”

● 화학적 변화가 뭡니까.

“물리적 변화란 지역적 연대, 지역구도를 만드는 것이죠. 계보정치 같은 것도 포함되고요. 옛날 DJT 연대나, 3당 합당이 돼 탄생한 민자당 같은. 그러나 이젠 새로운 정보 인프라의 발달, 대중지식의 공유로 환경이 바뀌었어요. 또 지역 간 문제가 아닌 세대 간, 계층 간 문제가 등장했고요. 그걸 어떻게 ‘가치와 비전’으로 엮어내느냐 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2007년 대선에선 한나라당이 그걸 해냈습니다. 그 전엔 민주당이 해냈지만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해 패배한 거고.”

● 김황식 신임 국무총리와 이웃에 살았다면서요.

“저도 그런 인연이 될 줄 몰랐어요. 장성 시골에서 태어나 읍내로 나와서 살았는데, 저희 집이 읍내 언덕 위였고, 김 총리 댁이 언덕 아래 맨 끝에 있었어요. 아마 김황식 총리가 서울대 법대 다닐 때였나, 어머니가 굉장히 부러워했죠. 그 쪽 아이들이 공부 잘한다고. 마침 우리도 7남매, 거기도 7남매였어요, 하하.”

● 솔직히 청와대 시절이 그립진 않습니까.

“이건 비밀이라며 제가 친구들에게 가끔 속삭이는 얘기가 있어요. ‘나 지금 정말 행복해!’ 이렇게 말입니다. 청와대가 지금쯤 어떻게 돌아갈지 훤히 보여요. 공무원들은 어떻게 해외 한번 나갈까 궁리하고, 정권 임기가 끝나면 무슨 일을 해야 되나 자리 고민하고….”

※‘구의원 이병완’은 청와대가 그립진 않다고 했다. 그러나 조금은 외로워 보였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가는 KTX 출발시각을 50분 앞둔 취재진이 부담스러워하는데도, “내가 기자 선배 아니냐”며 손을 잡아 끌고 근처 맥줏집으로 향했다.

‘낮은 곳’을 무대로 벌어지는 그의 정치실험은 과연 어떻게 매듭을 지을까. 그러고 보니, 인터뷰 서두의 의미심장한 대답 하나를 빠뜨렸다.

● 낮은 곳으로 임하셨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구의원은 ‘높은 곳’이에요.”


2005년 2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홍보문화특보 임명장을 받는 이병완씨. [중앙포토]

이병완의 청와대 시절
출입기자서 홍보비서관홍보수석 거쳐 비서실장까지

이병완 구의원은 KBS 기자를 거쳐 1994년 서울경제신문에 입사한 뒤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엔 홍보비서관(99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엔 기획조정·정무기획비서관, 홍보수석(차관급·2003~2005년)과 비서실장(장관급·2005~2007년)까지 거쳤다. 청와대에서 출입기자→홍보 비서관→홍보수석→비서실장까지 거친 것은 그가 유일하다.

지난 삶을 얘기하던 그는 ‘인생을 바꾼 선택’을 얘기했다. “중·고교 때 꿈은 논설위원이었죠. 중학교 1학년 때 글쓰기 대회에서 담임 선생님이 품평하면서 ‘병완이 너는 글 쓰는 직업이 좋겠다. 논설위원이 돼라’고 하셨죠.” 꿈은 현실이 됐다. 고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고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을 거쳐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했다. “그 뒤로 삶이 바뀌는데 그게 참 이상합디다.” 그는 “한국일보가 어려울 때 이규성 당시 재무부장관과 점심을 먹는데 ‘외환위기 구조조정도 필요하고 예금보험공사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고민이 많을 때라 승낙했죠.” 그러던 어느 날 묘한 청와대와의 인연(因緣)이 다가왔다. “98년 말인가 청와대 인사로부터 DJ가 홍보 기획 컨셉트가 없다며 짜증내는데 이형(兄)이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보름 뒤 홍보비서관을 뽑는데 그를 쓰겠다는 통첩이 왔다. 그때부터 청와대 인생이 시작됐고 홍보라인 요직을 거쳤다. 2000년 가을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노무현에게 직접 만남을 청했다. 다음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믿음에서라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언론계 선배 박무(전 머니투데이 대표, 2005년 작고)씨와 인사동에서 노 후보를 만났었다. “노 후보는 한번 주목해 볼 만한 사람”이라는 게 ‘박 선배’의 판단이었다. 이번엔 스스로 택한 인연이 삶을 바꾸었고, 노 전 대통령의 복심(腹心)을 읽는 자리인 비서실장에까지 올랐다.



j 칵테일 >>
“이 실장 저게 무슨 나무지?”
노 대통령 질문에 ‘식물 박사’ 돼

● 취미가 ‘식물 이름 외우기’라고 들었습니다.

 “그거 배우지 마세요. 힘듭니다.”

● 언제부터 그런 독특한 취미를….

 “청와대 가면 나무를 비롯해 식물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름을 안 붙여 놨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끔 산책하면 경호실장도 따라오죠. 대통령도 그런데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날 ‘저거 화살나무 아냐’ 하는 겁니다. 당연히 저는 잘 모르죠. 경호실장은 제꺼덕 답해요. 청와대 주변의 사물은 모두 다 외운 거죠. 경호라는 게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야….”

● 일인자가 뭘 물어 보면 ‘식은 땀’이 흐르죠.

 “그러다 2007년 3월에 비서실장을 그만뒀는데 집에서 가까운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산책 가니 나무에 이름이 다 붙은 거예요. 오가피 나무며, 그런 거 하나 하나 배우면서 너무 즐거웠죠. 그러다 광주로 와 보니 나주 쪽에 임업시험장이 있더라고요. 200여 종 식물 명칭이 다 붙어 있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 부인과 함께 산책 간다면서요. 나무만 찾으면 좋아합니까.

 “당연히 싫어하죠. 사찰이나 이런 데 방문하거나, 어디 가면 숲으로 가서 나무만 찾아 다니고 그러니.”

 ※이때 이병완 의원이 “광주 동명동 예술의 거리를 아냐고 역(逆)으로 질문을 해왔다. 거기 가면 ‘먼나무’(위 사진 참고)가 서너 그루 심어져 있다면서. “친구들 데려가 가끔 농담합니다. 이 나무가 뭔(무슨) 나무지? 하고요.” 친구들은 “뭔 나문지 나도 몰라” 답한다. 다시 이 의원이 말한다. “이 나무가 뭔나무라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친구들에게 원래 나무 이름이 ‘먼나무’라고 일러준다. 재밌는 발음의 나무 덕에 이렇게 유쾌한 순간도 누릴 수 있다고 그는 즐거워했다. 그가 기자에게 한마디 더 거든다. “이름 중에 ‘이나무’도 있어요. 재밌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