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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사각지대로 방치된 노인 우울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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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 수준이다. 특히 자살은 우울증이 있는 환자들에게서 월등히 높게 발생한다. 노인층에서는 젊은 사람에 비해 우울증의 빈도가 더욱 높아 무려 30% 정도가 우울증 환자라는 조사까지 있다. 노인 우울증 환자의 자살률 또한 젊은 사람에 비해서 최고 5배까지 높다는 보고도 있다.

 노인층에서는 신체의 기질적 질병이 있는 경우에도 우울증이 흔히 동반될 수 있다. 뇌졸중, 치매, 간질, 파킨슨병을 포함한 각종 신경과 질환에 동반되는 우울증(신경계 질환 우울증)은 그 발생 경로와 임상증상이 많이 다르다. 그 때문에 신경계 기저(基底) 질환을 철저히 치료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심해질 뿐만 아니라 기존 신경계 질환이 악화되거나 재활에도 큰 장애가 된다.

 그러나 현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험급여 기준에는 정신과 외에 타 전문 진료과에서 항우울제를 처방받으면 60일 후에는 무조건 정신과로 환자를 보내게 되어 있다. 뇌졸중으로 인한 반신불수, 치매로 길을 몰라서 보호자가 함께 해야 하는 환자, 10m도 걸어가기 어려운 파킨슨병 환자 등은 거동장애나 인지기능 저하로 병원 방문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도 신경계 질환에 동반된 우울증 환자 모두가 항우울제를 지속적으로 처방받기 위해서는 정신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환자들은 약을 중단하거나 때로는 자비 부담으로 우울증 약을 복용할 수밖에 없다. 약 복용을 중단해 신경계 질환과 동반되는 우울증이 악화될수록 기존 신경계 질환의 증세도 더 나빠지고 재발률과 사망률도 높아진다.

 우울성 질환은 고혈압·당뇨병과 같이 매우 흔한 질환이다. 그럼에도 국가기관이 ‘우울증은 정신과에서만 진료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우울증 치료제에 대한 편향된 요양급여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계 질환 환자들에서는 기존 신경계 증상과 우울 증상, 약물 부작용 등이 섞여서 나타난다. 이러한 증상을 잘 알고 감별할 수 있는 신경과 의사가 1차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합당하다.

 물론 우울증이 심각해 자살의 위험이 있는 경우, 또는 정신 증상을 보이는 주요 우울장애 환자의 경우는 정신과의 협진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투약 2개월 후 무조건 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보험급여 규정은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신경계 질환 우울증 환자들은 현재의 부적절한 요양급여 기준으로 인해 제대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곧 신경계 환자들, 가족, 동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며 기존 신경계 질환의 악화 및 재활 장애로 이어져 의료비용 상승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잘못된 항우울제의 요양급여 기준을 하루 속히 개선해야 할 것이다.

나해리 대한노인신경의학회 보험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