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콥터 벤’ 달러 살포에 기대 반 긴장 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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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미국 연준 의장

“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져들면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살리겠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이 2002년 한 말이다. 허약해지는 경제를 방치했다가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가느니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통화팽창 정책을 펴겠다는 얘기다. 이 말로 그는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닌다. 그가 지금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3일(현지시간) 연준의 통화정책결정기구인 연방시장공개위원회(FOMC)는 ‘양적 완화’ 재개 여부를 결정한다. 연준이 수천억 달러를 찍어내 채권을 사들일 것이라고 시장은 예상하고 있다.

 ‘헬리콥터 벤’이 뿌릴 달러는 미국에만 머물지 않는다. 금리와 성장률의 고저(高低)가 만든 ‘기압골’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달러 공습’ 예고에 신흥시장과 자원부국에선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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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뜬 시장=돈이 많이 풀린다는 건 일단 주식시장엔 호재다. 3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17.93포인트(0.93%) 오른 1935.97에 마감했다. 2007년 12월 6일 이후 최고치다. FOMC에 대한 경계심리가 움트면서 관망하던 외국인들이 다시 ‘사자’에 나선 영향이다.

 돈이 주가를 밀어올리는 이른바 ‘유동성 장세’에 대한 기대는 이미 상당 부분 증시에 반영돼 왔다. 이 때문에 FOMC의 결과에 따라 주가가 출렁일 수 있고, 투자자들의 차익 실현으로 주춤거릴 여지가 있다. 대우증권 허재환 연구원은 “그간 빠르게 해외자금이 들어온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유입 속도가 주춤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승의 큰 흐름은 이어질 것이란 시각이 많다. 당장 풀린 돈의 갈 데가 신흥시장과 주식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영증권 김세중 투자전략팀장도 “채권금리는 뚝 떨어져 있고, 부동산 경기 회복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볼 때 결국 돈은 주식과 원자재로 흐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본유입 규제 나서는 신흥국=미국이 디플레 공포에 빠져있다면 신흥시장과 자원부국은 반대로 인플레를 걱정하고 있다. 달러 약세 탓에 주요 원자재 값은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일 호주와 인도가 금리를 인상한 데 이어 중국도 돈줄을 조금씩 죄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이날 성명에서 “물가상승 압력을 무시할 수 없다”며 “통화정책이 그간의 위기 대응 모드에서 점진적으로 정상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금리를 올리면 저금리인 선진국에서 고금리인 신흥국으로의 자금 쏠림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단기 수익을 좇는 돈이 대거 들어오면 시장의 안정을 해치고, 통화가치 오름세가 더 가팔라져 수출경쟁력도 갉아먹을 수 있다.

 이런 딜레마 탓에 브라질·태국 등 신흥국들은 앞다퉈 자본 유입 규제에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응책 발표가 임박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3일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자본 유출입 추가 대책과 관련해 “모든 가능한 방안을 놓고 검토하고 있으며 상황에 맞춰 채택할 정책이 있으면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권혁주·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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