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에도 식지 않는 창작 실험 도전정신 놀랍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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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윤명로 화백이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자신의 전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예술가는 모방과 차용을 허락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다. 의미가 예술을 지배하면 예술이 쇠퇴하고, 예술이 의미를 배제하면 공허해진다. 나는 이 공허를 충만으로 가득 채우려고 시도해왔다.”

 한국 화가 중에서 처음 중국미술가협회와 중국국가미술관의 동시 초청을 받아 베이징에서 개인전(10월23∼11월10일)을 열고 있는 서울대 미대 윤명로(74) 명예교수. 미술 창작 50년을 넘긴 그는 예술을 하는 자세를 이렇게 정의했다.

 ‘겸재예찬’으로 주목받은 그는 신작을 들고 중국에서 개인전을 열어 중국 작가들이 “74세에 새로운 창작 실험의 성과를 내놓은 도전 정신이 놀랍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미술가협회 우창장(吳長江) 상임 부주석은 “이번에 소개된 작품들은 윤 화백의 창조적 정신 세계와 예술적 스타일의 체계적 기록”이라며 “현실을 초월한 부드러운 운율을 표현해 자유롭고 소탈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을 창조했다”라고 평가했다. 중국국가미술관 판디안(范迪安) 관장은 “구조적 추상에서 출발한 윤 화백의 작품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필법이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문인 추상으로 정착해 가고 있다”며 “동양적 미학이 스며든 심미적 경지를 창조해 ‘그림 밖의 그림, 소리 밖의 소리’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근 베이징에서 만난 윤 화백과의 일문일답.

 -초청 배경은.

 “당대 중국 미술계의 유명한 평론가이기도 한 판디안 관장은 ‘중국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내가 먼저 고민해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평했다. 그와 나는 젊은 작가들이 디지털이나 인터넷에 매혹돼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공감했다. 내 그림이 회화의 세계를 다시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같다.”

 -소개한 작품들은.

 “2002년 작품도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최근 작품을 발표하고 싶었다. 올 들어 만든 작품을 포함해 20점을 들고 왔다. (그림을 보여주며) 같은 톤인데도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홍채(虹彩)라고 하는데 내가 처음 시도했다. 중국 작가들이 신기하게 보더라.”

 -50년 창작의 에너지 원천은.

 “예술가는 차용이나 모방을 하면 안 된다. 살다 보면 돈과 명성 같은 유혹도 많다. 그런 것을 제쳐 놓고 돌아앉아 보면 참 고독하다. 아직도 그런 과정이다. 나의 창작 에너지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나온다.”

 -좋은 그림이란.

 “나는 한 번도 전시회에 작품을 내놓을 때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한 작품을 가리키며)이 작품이 ‘바람부는 날(windy day)’인데 제목을 붙여놓으면 관람객들은 바람만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은 내 산수 그림을 누드로 읽더라. 관람객의 폭 넓은 상상력을 작가가 제목으로 제약하면 안 된다.”

 -중국 미술은 시장에 걸맞은 작품성을 갖췄나.

 “시장은 커졌지만 중국 미술에 큰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제도권 화단에서 밖으로 튀어나간 독립적 화가들이 막상 큰 돈은 벌었다. 그러나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의 미술관들은 이들의 작품에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

 -한국 미술은 자부심을 느낄 수준인가.

 “가볍게 즐기는 네오팝이 유행했다. 다양성 차원에서는 인정하지만 누군가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가 갖고 있는 창조적 역량을 그대로 추구해 자기 세계를 독자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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