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4) 불붙은 고지 쟁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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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선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대구의 육군본부에서는 아침 9시가 되면 늘 브리핑이 열렸다. 나는 육군본부에 늘 일찍 출근했다. 규정보다 한 시간 이른 8시에 육본에 도착했다. 일찌감치 업무를 시작하면 맑은 머리를 유지한 채 업무를 보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져 좋다. 더구나 조용한 아침에 여러 가지를 구상할 수 있었다.

 첫 일과가 브리핑이었다. 참모진과 병과장, 미 군사고문단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다. 내가 참모총장에 취임한 직후의 전선 상황은 비교적 조용했다. 충돌이라고 해봐야 작은 규모의 매우 국지적인 싸움만이 간간이 펼쳐졌다. 그래서 브리핑 중에는 그런 전선 상황이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2년 8월 말에 접어들면서 전선이 소란스러워졌다. 전선 상황이 브리핑 서두(序頭)에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시였다. 적과 벌이는 싸움은 어느 것 하나라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는 고지 쟁탈전이 대부분이었다. 전선의 유리한 고지를 먼저 빼앗거나, 이미 빼앗겼던 고지를 탈환하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의 상황이 점차 격렬해져 갔다. 당시 적의 주류는 중공군이었다. 북한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의 일부에만 있었다. 주요 전선은 모두 중공군이 나서서 도발을 하고 있었다.

 매일 브리핑에 올라오는 전투 중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런 중공군의 도발이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하기 전 금성 돌출부를 방어하는 2군단을 이끌고 중공군의 준동을 사전에 막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적군의 주류를 형성했던 중공군의 동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52년 9월에 접어들면서 싸움이 크게 번졌다. 9월 5일이 되자 강원도 금성 동남쪽 40㎞ 지점의 수도고지와 지형(指型) 능선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고지 쟁탈전이 불붙었다. 야포가 불을 뿜고 그 뒤를 이어 보병이 육탄전을 치르면서 올라가 적의 고지를 빼앗는 쟁탈전은 그야말로 혈전(血戰)의 연속이었다.

 이런 전투에는 일종의 기(氣) 싸움과도 같은 성격이 있었다. 고지전이 벌어지던 그 무렵은 휴전회담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게 흐른 시점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휴전회담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높은 곳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감제(瞰制) 고지를 먼저 차지하는 게 중요했다.

 전선의 싸움은 휴전이 이뤄질 경우를 대비해 먼저 그런 고지를 최대한으로 선점(先占)하기 위한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전선상의 고지를 많이 차지할수록 회담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고지를 최대한 지키거나, 적에게 넘어간 고지를 빼앗아 오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적 또한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수도고지는 지형적으로 볼 때 그렇게 민감한 곳은 아니었다. 강원도 금성군 일남면의 높이 600m 정도의 이곳은 사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고지에 불과했다. 북한강과 금성천이 서로 만나는 곳에 있다는 점, 그 밑에 형성된 계곡을 감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에서의 기세 싸움을 위해 어떤 고지든지 먼저 차지하려고 덤볐던 아군과 적군은 이곳에서 아주 거센 전투를 벌여야 했다. 특히 북한이나 중공군이 자신에게 유리한 휴전 조건을 강요하는 다른 한편으로 전초진지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모든 전선에서 싸움을 걸어오면서 이 수도고지는 9월 들어 격렬한 전쟁터로 변했다.

 이 지역의 방어는 송요찬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이 맡고 있었다. 6·25전쟁 초반부터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지리산 대토벌, 51년 중공군 춘계 공세 때의 대관령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던 역전의 수도사단이었다. 송 장군의 수도사단과 중공군은 총공세로 서로 맞붙어 15일 동안 싸움을 벌였다. 보름 동안 진지는 일곱 번 빼앗겼다가 다시 일곱 번을 되찾는 혈전의 연속이었다.

 그 첫 싸움은 8월 5일 벌어졌다. 그날 밤 중공군은 대규모 야습(夜襲)을 벌였다. 중공군은 늘 그렇듯이 우리의 의표(意表)를 찌르고 들어왔다. 아군이 차지하고 있던 고지 전면에서 동굴을 판 뒤 그 속에 병력을 숨겼다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일거에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당시 수도사단 1연대장이었던 박춘식 대령은 “밤이 되자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지더니, 얼마 후 2000여 명의 중공군이 능선에 침투했다. 삽시간에 전초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적들은 진지 앞에 굴을 판 뒤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해왔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육탄전이 불붙었고, 수도사단은 결국 고지를 지켜냈다.

 그러나 이는 참혹했던 수도고지 전투의 서전(緖戰)에 불과했다. 9월 5일 중공군은 다시 기습했다. 이번에는 작전 전에 야포로 진지를 맹렬하게 포격하는 대규모 공세였다. 뺏고 빼앗는 전투가 이어지면서 고지와 그 주변에는 하루 3만 발 이상의 포탄이 떨어졌다. 전투는 보름 동안 매일 벌어졌다.

 수도고지 위에 있던 흙은 모두 뒤집혔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포탄으로 흙은 뒤집히고, 또 뒤집어졌다. 그 작은 고지 위에는 매일 전사자의 시체가 쌓여갔다. 결과적으로 수도사단은 고지를 지켰다. 아울러 쳐들어온 적을 몰아내면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지형 능선까지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50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국지적인 고지 쟁탈전에서 발생한 사상치고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피해는 이보다 훨씬 더 컸다. 중공군 12군 산하의 3개 사단이 교체되어 투입된 이 고지전에서 적은 아군보다 세 배에 이르는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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