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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본 황태자 방한을 앞둔 통감부의 호들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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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00년께의 서울 도성. 일본 황태자 방한을 앞두고 급조된 성벽처리위원회는 수백 년간 서울의 원형을 표시했던 도성을 파괴해 버렸다. 일본인들이, 일본 황태자를 위해 진행한 준비 작업은 도시의 형태마저 바꿨고, 수많은 사람을 공연히 괴롭혔다. [사진 :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

1907년 10월 5일 서울 명동에 사는 홍경윤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평소 폐결핵을 앓던 사람인지라 가족들은 그 탓에 죽었으려니 하고 장례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헌병과 의사가 들이닥쳤다. 일본인 의사는 콜레라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고, 헌병들은 곧바로 주변 도로 일대에 새끼줄을 치고 행인의 출입을 엄금했다. 대도시에서는 늘 있는 일에 일본인들이 갑자기 민감해진 것은 며칠 후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일행의 방한 때문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 양위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이어 황태자 영친왕을 일본에 끌고 가 인질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 일이 한국민의 반일 의식에 불을 지필 것을 예상한 그는, 사전 공작의 하나로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추진했다. 일본 황태자의 방한이 공식 발표된 것은 이 해 9월이었지만, 방한에 대비한 작업은 7월에 시작됐다.

 통감부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일본 황태자 일행이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일이었다. 9월 초부터 대대적인 방역 사업이 벌어졌다. 통감부와 일본군은 각 항구에 검역반을 파견했고, 서울에서는 전염병 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적발해 격리했다. 당시 남대문 밖에는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통감부는 이 연못이 전염병의 온상 구실을 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메워 버렸다.

 서울 성벽이 헐린 것도 이때였다. 고종을 강제 양위시킨 직후 통감부는 한국 정부의 내부·탁지부·군부 등 각부의 차관급 인사들로 성벽처리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각부 차관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는데, 위원회는 일본 황태자의 방한에 앞서 간선도로 주변의 성벽을 모두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성벽이 교통을 방해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경호상의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황태자가 남대문 지붕 밑으로 지나는 것은 제국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니 이마저 철거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서울 시민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도로를 청소했고, 거리의 땔감장수와 채소장수들은 뒷골목으로 밀려났다.

 일본인들이 자기들 황태자 방한에 호들갑을 떤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도 오랫동안 외국 국가원수 방문이나 국제행사를 앞둔 호들갑은 되풀이됐다. 그러나 호들갑은 격조나 품격과는 한참 거리가 먼 단어다. 곧 세계 19개국 정상들이 한국을 방문한다. 불과 한 세기 만에 변방의 보호국에서 주요 20개국(G20)의 일원으로 발전한 나라의 국민답게 품격과 격조를 지키며 차분하게 정상들을 맞이했으면 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