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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홀대하는 현실 타파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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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99년 말 미국은 21세기에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창조적 미국(Creative America)’ 건설을 가장 중요한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미국이 개발해 주도하고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혼을 불어넣는 콘텐트였다. 이 콘텐트는 사회과학·인문학과 예술에서 나오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그 분야에 국립과학재단·국립인문학재단·국립예술재단 등을 통해 대규모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창조적 미국을 만들기 위해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돈을 쏟아부을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은 빗나갔고, 미국 정부의 선택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과학기술, 특히 응용 과학기술에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요자인 기업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정 수준의 투자를 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을 상상력과 접목해 부가가치 높은 명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사회과학·인문학·예술 콘텐트는 장기간의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시장에 의해 적기에, 최적으로 공급되지 않는 공공재(public goods)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 분야의 연구·교육 지원은 정부가 해야 한다.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나라인 미국도 사회과학·인문학·예술에 대한 정부의 대규모 지원을 최우선 밀레니엄 과제로 선정한 것이다.

 한국 대학의 사회과학 분야에는 한국 최고의 영재들이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와 다닌다. 그런데 이 최고 영재들이 지금 사회과학 연구에 몰두하기보다는 각종 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사회과학자가 되었을 때 높은 보수와 수입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배우는 교수와 강사들로부터 읽었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과학의 연구인력(전임교수 기준)은 21.5%이고, 자연과학은 10.8%인데 반해 연구지원 비율은 사회과학 3.6%, 자연과학 27.2%로 불균형이 매우 심각하다. 지금도 사회과학자들의 57%가 연구비 지원 없이 논문을 창출하며 학문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비 지원도 없이 고독하게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의 ‘나 홀로 연구’만으로는 한국사회과학의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없다.

 21세기에 선진국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소득보다는 법치, 신뢰(사회적 자본), 정치적 시민적 자유, 관용, 민주주의의 질, 사회복지와 같은 사회과학적 제도·가치·규범의 수준이다. 선진국의 사회과학을 모방만 하다가는 시지프스처럼 영원히 ‘따라잡기’를 반복하는 ‘변방’ 사회과학을 탈피할 수 없다.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대규모 지원, 후속 세대 육성, 사회과학과 인문학·예술·자연과학·공학 등 타 학문 분야의 융합연구 장려를 통해 한국 사회과학의 혁신(innovation)을 이루어냄으로써 선진국도 벤치마킹하려는 창조적 사회과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사회과학이 미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양극화·저출산 고령화·가족해체·위험사회·다문화사회와 같은 미래의 변화를 주도할 어젠다에 대한 창조적 선제대응 (proactive response)의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